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Gaius Aufidius Victorinus)는 2세기에 활동한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이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우였고, 동시에 연설가 및 변론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의 사위였던 그는 집정관 직을 두 차례 그리고 로마 속주의 총독도 몇 차례 맡았다. 생애빅토리누스는 움브리아의 피사우룸 출신이었다.[1]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이 프론토 밑에서 수학하였고, 이때 그와의 우정이 시작되었다.[2] 155년에 빅토리누스는 보좌 집정관이 되었고, 그 뒤에 162년경부터 166년경까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으로 있었으며, 재직 당시에 카티족의 침입을 막아내는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마쳤다.[3] 프론토가 그가 총독이던 시절에 그에게 보낸 서신 두 개가 남아 있다. 첫 번째에서, 프론토는 안토니누스 아퀼라의 수사학자 자리를 얻는 데 그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4] 두 번째에서, 프론토는 빅토리누스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에 있었을 때 프론토에게 맡기고 간 두 아들들의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5]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에서 임기를 마친 뒤, 빅토리누스는 다키아 속주의 총독이 되었고 (168/9년), 그 다음에는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170/1년 추정),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171년-172년)의 총독직을 이어서 수행했다.[6] 그런 다음 빅토리누스는 아프리카 속주의 프로콘술 (173/5년)을,[7] 177년과 179년 사이에는 시리아의 총독을 맡았다.[8]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로 있던 임기 (179년부터 183년까지로 추정) 마지막 해에,[9] 빅토리누스는 콤모두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두며 생애 두 번째 집정관이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콤모두스의 재위가 시작되던 때, 빅토리누스는 여전히 존경받는 명사였으나, 카시우스 디오는 콤모두스가 아마 친위대 사령관 섹스투스 티기디우스 페렌니스의 선동으로 빅토리누스를 죽이려 했다고 하였다.[10] 가정빅토리누스는 프론토의 딸 그라티아와 혼인했다.[11] 이들 사이에 최소 아들 세 명이 있었고, 그 중 한 명은 빅토리누스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으로 있던 시절 세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12] 나머지 두 명은 마르쿠스 아우피디우스 프론토 (199년 직권 집정관)와 가이우스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 (200년 직권 집정관)이다. 각주
추가 서적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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