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 정치범수용소(价川政治犯收容所, 정식 명칭:개천 제14호 관리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평안남도개천시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이다. 개천시내에서 20Km 남동쪽 대동강 유역에 위치해 있다. 또다른 정치범 수용소인 '개천 제1호 교화소'는 14호 관리소의 북서쪽으로 2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개천 정치범수용소는 종신형과 사형자들만 모아놓기 때문에, 탈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개천 제14호 관리소는 1959년 조선의 평안남도개천시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약 20 km 떨어진 곳에 만들어졌다.[1] 남쪽으로는 대동강이 관리소의 경계와 맞닿아 있고, 강 북쪽에 있는 부락산 일부가 관리소 안에 위치해 있다. 대동강 맞은편에는 북창 제18호 관리소가 있다.[2] 위성 사진으로 확인된 관리소의 면적은 약 155 km2로서, 서울시 면적의 1/4 또는 개천시 전체 면적의 1/5의 규모이다.[2][3] 수용소 인근에는 대동강을 따라 대건선이 통과하며 외동역이 설치되어 있다.
현황
관리소는 "교화가 불가능"하다고 분류된 정치범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1] 관리소의 수감자들은 광산·집단 농장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된다.[4]
개천 관리소의 수감자들은 한번 들어오게 되면 석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5] 사망할때까지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1] 수감자들은 외부 세계와 철저히 격리되어 생활하고, 관리소 안에는 죄수들을 위한 막사가 각각 남자, 여자, 청소년별로 분리되어 있다. 모두 15,000명 가량의 죄수들이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4]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간수들의 막사와 행정본부등이 관리소 안에 별도로 존재한다.
관리소내 인권침해 실태
개천 수용소를 탈출한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감자들은 오전 5:30부터 자정까지 탄광과 공장에서 고되고 위험한 일을 하도록 강요받는다.[6] 적게는 11살된 어린이부터 학교 수업이 끝나는 대로 작업장에 배치되고, 아이와 부모가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매주 제한적이다.[7] 수용소의 규칙을 어기게 되면 사소한 것에도 고문이 가해지고, 심한 경우에는 사형에 처해진다.[8] 수용소 내의 식량 사정은 매우 열악해서 죄수들은 500g이 조금 안 되는 옥수수밥과 염장(소금)국만 배급받을 뿐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양 결핍으로 쇠약해지고, 매년 질병, 사고, 영양실조, 고문에 의한 후유증등으로 사망하고 있다. 단백질 부족과 비타민 B3(니코틴산) 결핍은 심각한 질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생존을 위해서 들쥐, 뱀, 개구리, 곤충등을 잡아먹는다.[1] 수용소 규칙 상 배급된 식량 외에 동물이나 식물을 사냥, 재배해 섭취하는 것은 불법이므로 적발 시 고문이나 독방 수감 등의 징계가 뒤따른다.
신동혁의 증언
개천 수용소를 탈출한 신동혁은 수용소에서 경험하고 목격한 인권 유린사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
신동혁의 어머니와 형이 탈출하려 했다는 것이 발각되었들때, 설수도 없고 누울수도 없는 지하 감방에 보내졌다. 그는 이곳에서 여덟달 동안 지내며 고문을 받았다.[9][10]
고문을 받는 동안 신동혁은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발에는 수갑이 채워지고 두 손은 묶인채로 감방의 천장에 매달려졌다. 그를 고문하는 간수들은 달구어진 화로를 매달려 있는 신동혁의 등아래에 놓고, 뜨거워서 발버둥치는 신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갈고리로 그의 아래배를 찔렀다.[11] 이때의 후유증으로 신동혁은등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고문으로 인한 흉터를 얻었다.[12] 당시 신동혁의 나이는 14세였다.[10]
실패한 탈출 시도로 신동혁의 어머니 차혜경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그의 형 신하근은 총살형에 처해졌다.[13][14] 신동혁은 이들의 공개처형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다.[10]
피복공장에서 일을 하는 동안 신동혁은 실수로 재봉틀을 떨어트린 적이 있었다.[10] 이에 대한 처벌로 수용소 간수들은 그의 중지 한마디를 절단했다.[15]
신동혁은 매년 십여건의 공개 처형이 집행되는걸 목격했다.[1] 또다른 수감자인 김영은 그가 속한 관리소 구역에서만 2년동안 약 25명이 처형되는 것을 목격했다.[16]
한 6살짜리 소녀는 옥수수 5알을 몰래 훔친것이 발각되어 간수에게 맞아 죽기도 했다.[1]
신동혁이 12살이 되던해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게 되고 그의 어머니와 만날수 있는 시간도 통제를 받았다. 수용소내의 아이들은 공부대신 김매기, 가을걷이, 거름 나르기등과 같은 육체노동에 시달렸다.[9]
13살에서 16살이 되었을때, 신동혁은 위험한 건축공사 현장에 투입되었고 많은 또래 아이들이 작업장에서 사고로 죽는 것을 보았다. 가끔 하루에 네다섯명의 아이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한번은 여덟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9]
신동혁의 사촌누나는 간수들에 의해 강간당한 뒤 죽었다. 사촌누나의 어머니도 딸의 죽음에 통곡하다가, 어디론가 끌려가서 사라졌다.[17]
한번은 수용소 보위 지도원들이 이를 잡기 위한 약이라면서 액체로된 화학약품으로 목욕을 하도록 지시했다. 여자 5명과 남자 7명이 이 액체로 몸을 닦았고, 이들은 한달뒤 살이 문드러져 죽어갔다.[10][17]
신동혁이 수용소를 탈출할 때 그와 같이 탈출하던 박용철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감전되어 즉사했다.[1]
탈출한 수감자
김용(1995–1996 개천 수용소 수감, 이후 북창 수용소로 이송)은 그의 아버지와 형이 미국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것을 숨겨오다가 이것이 발각되면서 투옥되었다.[4]
신동혁(출생시 이름: 신인근, 1982-2005 개천 수용소 수감)은 관리소 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전쟁중 형제들이 남한으로 도망쳤다는 이유로 개천 관리소로 끌려왔다.[1][18]
관련 서적
Blaine Harden, Escape from Camp 14: One Man's Remarkable Odyssey from North Korea to Freedom in the West , Viking (March 29, 2012), hardcover, 224 pages, ISBN-10 0670023329, ISBN-13 978-0670023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