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두비슬라프 루트비히 폰 피르히게오르크 두비슬라프 루트비히 폰 피르히(Georg Dubislav Ludwig von Pirch, 1763년 12월 13일 – 1838년 4월 3일)는 프로이센 중장으로,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여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동생인 오토 카를 로렌츠 폰 피르히와 구별하기 위해 가끔 피르히 1세로 불린다.[1] 생애게오르크 두비슬라프 루트비히 폰 피르히는 1763년 12월 13일 마그데부르크에서 태어났다.[2] 1775년에 피르히는 프로이센군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헤센-카셀 45번 보병 연대의 사관생도가 되었다.[2][3] 1787년에는 프로이센의 네덜란드 침공에서 활약했고, 1793년에는 마인츠 포위전에 참전했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이 패배한 후 2년 동안 프랑스의 포로가 되었다.[3]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이 시작되자 피르히는 1813년 4월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보헤미아군 소속으로 뤼첸, 바우첸 전투, 드레스덴 전투, 쿨름 전투에서 싸웠고, 소장으로 진급하며 철십자 훈장 2개 등급을 모두 받았다.[3][2] 라이프치히 전투에서는 그의 여단이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프스트하이다 마을 점령을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의 역할로 그는 참나무 잎이 달린 푸르 르 메리트와 러시아 성 안나 훈장 1급을 받았다.[2] 1814년에는 블뤼허의 지휘 아래 라온 전투에 참전했다.[3] 1815년 5월, 프로이센 제2군단장 카를 루트비히 폰 보르슈텔 장군은 봉기한 작센 부대에 대한 거친 처우에 항의하다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피르히가 그를 대신하여 군단장이 되었다.[3] 워털루 전역이 시작될 때 피르히의 지휘 아래 제2군단은 3만 명의 병사와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군단은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격렬하게 교전하여 약 6천 명의 사상자와 비슷한 수의 탈영병을 냈다.[1] 6월 18일, 피르히의 군단은 뷜로우의 제4군단을 따라 우아브르를 출발하여 결국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측면에 도달했다. 피르히의 선두 부대인 제5보병여단은 플랑스누아 마을을 둘러싼 격렬한 전투에 합류했다. 피르히의 제2군단 중 일부만이 전투에 참가했으며, 상당 부분은 진흙탕 도로에 발이 묶였다.[1] 전투 후 피르히는 그루시의 군대가 우아브르에서 후퇴하는 것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그의 병사들의 피로와 정찰 부족으로 인해 나뮈르에 대한 공격은 실패했다.[2] 워털루 이후 피르히는 제2군단 지휘권을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왕자에게 넘겼다.[3] ![]() 전쟁이 끝난 후 피르히는 중장으로 진급하고 4,000 탈러의 선물과 참나무 잎이 달린 적수리 훈장 1급 및 러시아 성 게오르기 훈장 3급을 포함한 여러 상을 받았다.[2] 그는 증가하는 난청으로 인해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아 1816년에 퇴역했다.[1] 피르히는 1838년 4월 3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2] 평가프로이센 장군 아우구스트 폰 노스티츠는 피르히를 하급 지휘관으로서 더 적합한 인물로 평가했는데, 그는 자신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겠지만 상황과 더 큰 목표를 고려하여 독립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2] 각주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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