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향교
경주향교(慶州鄕校)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향교이다.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개요경주향교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향교의 위치는 계림(鷄林) 서쪽, 문천(文川) 북쪽에 해당하는데, 신라의 국가 최고교육 기관인 국학(國學)이 있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신라 멸망 뒤에 서라벌이 경주로 개칭되면서 고려 조정에 의해 향학(鄕學)이라는 이름의 지방교육 기관으로 개편되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효(元曉)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의 과부 공주를 만난 요석궁(瑤石宮)에 대해 "지금의 학원이 이곳이다"(今學院是也)라는 주석을 남기고 있다. 조선 개창 뒤에도 향교로써 지방교육 기관의 역할을 이어갔다. 성종(成宗) 23년(1492년) 경주부윤 최응현(崔應賢)에 의해 한양 성균관의 제도에 준하여 새로이 중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宣祖) 33년(1600년) 대성전과 전사청을 중건하고, 4년 뒤에는 대성전의 동서 무(撫)를 중건하였다. 명륜당과 동서 재(齋) 등의 강학공간은 광해군(光海君) 6년(1614년)에 중건되었다. 숙종(肅宗) 31년(1705년) 부윤 여필용(呂必容)이 경상관찰사 김연(金演)의 협조를 얻어 향교를 중수하였다. 고종(高宗) 17년(1880년) 부윤 민치서(閔致序)가, 22년(1885년) 부윤 민영규(閔泳奎)가 향교를 중수하였으며, 중수 당시에 경주의 유림 손상규(孫相奎)와 최세학(崔世鶴)이 지은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두 사람 모두 월성 즉 경주를 본관으로 삼는 경주 유림이었다). 동왕 광무(光武) 3년(1899년) 다시 유림의 지원으로 향교를 중수하였을 때는 군수 조의현(趙儀顯)이 몸소 기문을 지었다. 1919년 유림들이 모성계(慕聖契)를 결성해 성금을 모아 향교를 중수하였다. 그러나 해방 뒤 6.25 전쟁으로 향교는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었고, 서재와 전교실이 무너지기까지 하였다. 1956년에야 지방 유림들이 다시 모성계를 결성, 향교를 중수하고 전교실을 복원하였다. 1978년 담장을 다시 쌓았다. 2011년 12월 7일 경주향교 대성전이 대한민국 보물 제1727호로 지정되었다. 향교 안에는 선조 34년(1601년) 당시 제독관 손기양(孫起陽)이 흩어져 있던 각종 학규(學規)를 엮어서 작성한 《경주향교학령》(慶州鄕校學令)이 남아 전하고 있는데, 일종의 교내 학칙으로써 이는 조선 전기 향교 교육의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 건축경주향교는 경상북도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향교이다.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앞에 두고,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뒤에 두는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 배치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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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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