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 시즈가와병원
공립 시즈가와병원(일본어: 역사1953년 1정3가무라 국민건강보험 직영조합병원(일본어: 1町3カ村国保直営組合病院)으로 개업, 1955년 시즈가와정, 도쿠라촌, 이리야촌이 합병하면서 시즈가와-우타쓰 조합병원(일본어: 志津川・歌津組合病院)으로 개칭하였다.[2] 1975년 3월 철근 구조 4층 건물로 재건축을 시작하였고 1984년 11월 증축 공사가 완료된 후 공립 시즈가와병원으로 개칭하여 종합병원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3] 1990년 3월에는 인공투석센터가 건립되었다.[4] 1995년 무렵부터 일본 후생성의 방침으로 일본의 다른 병원들과 마찬가지로 의료비 및 진료비를 낮춰야 해 1999년 산부인과가, 2001년 6월 비뇨기과가 폐쇄되었다. 같은 시기 최소 법정의사수 16명에 미치지 못하는 6명의 의사로만 영업을 하고 있었다.[5] 이 상황에 당시 미야기현 현의회에서 질문을 받은 미야기현 현지사인 아사노 시로는 "생명과 관련이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의사 확보에 전력을 다하겠다"며 미야기현의 문제로 떠오른 적도 있다.[6] 헤이세이 대합병으로 시즈가와정과 우타쓰정이 하나로 합병되면서 미나미산리쿠정이 탄생한 2005년 10월 1일 재개원하였다. 개원 당시에는 일반병상 90석, 요양병상 50석이었으나 2007년부터 일반병상을 76석으로 축소하였다.[7]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1960년 5월 일어난 칠레 발디비아 지진 당시 일본 미야기현 연안에 2.8m에 달하는 쓰나미가 몰려와[8] 연안 지역에는 이의 2배가 넘는 5.5m 높이의 제방이 쌓였으며 또 병원도 병실을 해발 고도 약 6m보다 높은 3층에 설치하였으며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5층 옥상은 자연재해 발생 시 병원 관계자 이외에도 피난을 올 수 있는 쓰나미 피난소로 지정되어 있었다.[8][9][10][11]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당시에는 병원 4층 부분까지 쓰나미로 침수되어 옥상으로 피난을 돕던 간호사 등 병원 직원 4명과[12] 옥상으로 전부 대피하지 못한 입원환자 107명 중 67명이 쓰나미에 휩쓸렸다.[13] 또한 쓰나미로 대피하던 150명 가까이가 병원 옥상에 있었으나[14] 3월 12일 자위대의 헬리콥터로 구조가 되기 전까지 버티지 못한 환자 7명이 저체온증이나 저산소증으로 사망하였다.[15] 완전히 환자를 구출하는 4월 21일까지 총 2주간 진료를 봐 주던 의사 간노 다케시는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 구조되었으며 타임 100의 2011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목록에 선정되기도 하였다.[16][17][18][19] 3월 27일 외국인 의료진으로는 처음으로 도호쿠 지방에 들어온 이스라엘 재해지역 파견팀이 나리타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였으며,[20] 구리하라시 및 미나미산리쿠정의 미나미산리쿠정 스포츠교류촌[21]과 미나미산리쿠정 종합 체육관[22]에 "이스라엘 의료센터"라고 칭한 임시시설에서 3월 29일부터 4월 10일까지 의료 봉사 활동을 하였다.[23] 4월 15일 이스라엘 의료팀이 빠져나온 후,[24] 기존에 있던 임시 시설과 의료 장비를 이용하여[25] 공립 시즈가와병원의 생존한 의사 및 간호사들, 도호쿠 대학 병원 인원들이 모여 임시로 외래진로를 봐 주는 "공립 시즈가와병원 가설진료소"를 세웠다.[26][27][28] 재해지역의 의료파견팀이 대부분 4월 말 안에 철수하면서 지역 의료대책본부의 방침으로 5월 14일부터 시즈가와 지역은 공립 미나미산리쿠 진료소가, 우타쓰 지역은 민간의원인 가마타 의원 임시진료소로 의료 인력을 집중시키고 환자들을 위한 셔틀 버스를 운행하기 시작하였다.[29] 지진으로 원래 있던 병원이 완전히 파괴되어 새로운 병원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2015년 11월 25일 후계 병원인 미나미산리쿠 병원 건물이 완공되었으며,[30] 12월 14일 10개 진료과 90개 병동의 미나미산리쿠병원이 개원하여 공립 시즈가와병원은 폐원하였다.[1] 같이 보기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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