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비 왕씨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 생몰년 미상)는 고려 후기의 왕족이다. 충렬왕의 증손녀이자 공양왕의 어머니이다. 삼한국대비(三韓國大妃)라고도 한다[1][2]. 생애가계생년은 확실하지 않으나, 생일은 음력 1월 17일이다[3]. 충렬왕과 정신부주(정화궁주)의 장남인 강양공의 손녀로, 아버지는 연덕부원대군, 어머니는 안의비 조씨이다[4]. 대비 시절왕족이었던 그녀는 같은 왕족인 정원부원군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 중 차남 왕요가 1389년(공양왕 원년) 이성계 일파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니 곧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그녀는 아들이 왕위에 오른 해 음력 11월 복녕궁주(福寧宮主)에 봉해지고[5], 이듬해인 1390년(공양왕 2년) 음력 1월 15일에는 그녀를 위한 관부가 설치되어 그 이름을 숭녕부라고 하였다[6]. 이어 같은 해 음력 4월 13일 자예정명익성사제혜덕삼한국대비(慈睿貞明翼聖思齊惠德三韓國大妃)의 존호를 받고, 그녀의 거처를 정명전으로 칭하게 되었다[7]. 공양왕은 왕대비인 정비 안씨보다 생모인 그녀를 더욱 지극히 모셨는데, 특히 공양왕이 왕대비 안씨에게는 문안을 올리지 않고 그녀에게만 문안을 올리자 신하들이 왕대비에게도 문안을 올릴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2]. 한편 정식으로 국대비가 된 그녀는 1391년(공양왕 3년) 음력 2월 남경(지금의 서울특별시 일대[8])을 다녀왔으며[9], 그 해 음력 5월 등에는 그녀를 위한 잔치가 열렸다[10]. 또 음력 7월 21일에는 그녀와 정비 안씨, 공양왕비 순비 노씨의 3대 조상에게 시호가 올려졌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인 연덕부원대군에게는 양효공(良孝公)의 시호가, 어머니 조씨에게는 안의비(安懿妃)의 시호가, 그리고 그녀의 할아버지인 강양공에게는 정강공(靖康公)의 시호가 각각 추증되었다[4]. 사망과 후손1392년(공양왕 4년) 음력 3월 10일 손자인 세자 왕석의 귀국 소식을 보고받았다는 내용[11]을 끝으로 더 이상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이 없다. 1392년 당시 공양왕이 48세였으니, 그녀는 이미 노년기였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언제 어디서 생을 마감했으며, 어디에 묻혔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왕씨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 우는 정양군에 봉해졌으며, 1389년(공양왕 원년)부터 공양왕의 4대조의 제사를 맡아 지내게 되었다. 정양군은 사망 후 경희(景禧)의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 둘[12]과 딸을 두었다. 정양군의 딸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아들인 무안대군과 결혼하였다[13]. 차남 요는 공양왕이다. 가족 관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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