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성(사적 제215호)은 왜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1703년(숙종 29)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쌓은 둘레 9,011보, 높이 15척 규모에 동서남북 4곳에 성문이 있는 석성(石城)으로 ,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이다.[1]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금정산성의 중성(中城)을 축성하면서 금정산성과 산성 일대를 관리하기 위해 좌기청 6간, 좌우행랑 각 5간, 군기고 4간, 화약고 1간, 내동헌 3간, 별전청 4간 규모의 금정진 관아를 만들었고, 1824년 동래부사 이규현(李奎鉉)이 금정산성 내에 건물을 짓고 진장(鎭將)을 배치하였다.[1]
평상시에는 금정산성 내의 해월사(海月寺), 국청사(國淸寺)의 승려들이 성의 보수와 유지를 담당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금정산성 내에 있던 금정진 관아들이 파괴되고 여기에 있었던 무기 또한 몰수당하였다.[1]
『동래부지(東萊府誌)』 「관해조(官廨條)」와 1872년에 제작된 「금정산성진지도(金井山城鎭地圖)」 등에 금정산성 내 시설물의 위치 관계가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금정진 관아의 건물 규모와 함께 금정진 관아의 배치 관계를 설명해 주는 내용이 문헌으로 남아 있다.[1]
또한 2004년 금정진 관아터의 일부 지역에 대한 발굴(시굴)조사를 통하여 20~50㎝ 규모의 크고 작은 할석(割石)을 이용한 금정진 관아터 석축유구(石築遺構)가 확인되었으며, 일부이지만 지상에서도 금정진 관아의 담장 또는 석축으로 추정되는 유구들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1]
금정진 관아터는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 이후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국내 최장의 산성인 금정산성을 관리하던 관방시설(關防施設)의 유지(遺址, 터)로 관아의 규모, 운영, 직제, 성격과 관군과 승군(僧軍)들이 머물며 생활했던 생활상을 등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유적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