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이리시에서 태어나 중앙동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서울로 이사하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중 ‘도비두’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노래 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재동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을 만나면서 〈아침 이슬〉을 주었고, 1971년에 발표했다.[6]
1972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 등을 부르다 경찰서 연행되었으며, 그의 앨범 및 노래를 모든 방송에서 금지했다. 이후 김민기는 시인이자 서울대학교 동문인 김지하와 조우했고, 야학 활동을 했다.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노동자들과 함께 공연했던 그는 국악인들과 교류하여 다음해 〈아구>를 무대에 올렸다.[6]
1974년 군에 입대해 1977년 전역하였다.
1977년, 제대한 후 공장에서 일하다 양희은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을 1979년 발표했고, 동일방직 노조 문제를 다룬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발표했다.[6]
1979년 12월에는 문화 체육관에서 공연을 펼쳤고 1983년에는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했다. 1987년,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고, 1991년 학전(學田) 소극장을 개관했다. 그는 1993년에 22년 만에 독집 앨범을 발표했고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 활동을 했다.[6]
개관한 극장을 ‘학전블루소극장’으로 운영하고, 1996년 ‘학전그린소극장’까지 열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2010년 이후 공연 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 관객은 점점 줄어들었고, 2013년에 그린소극장을 먼저 폐관했다.
학전은 재정난 및 김민기 대표의 위암 투병으로 인해 33년 만인 2024년 3월 15일에 폐업했다. 7월 21일 김민기가 사망하였다.[7]
1966년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기타를 선물받았고, 독학으로 기타를 익히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1969년 서울대학교 회화과 재학 시절 고교 동창이자 대학 동창인 김영세와 '도비두(도깨비두마리)'라는 포크 밴드를 결성하여 음악활동 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다.
김민기가 대학을 입학하던 1969년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삼선개헌안의 통과가 이루어지며, 대한민국 정치사의 큰 변혁 바람이 일렁이던 때이다. 정치사와 관련하여 당시 대중음악계 역시 사회 변혁에 영향을 받아 저항 노래의 동태가 시작했다. 동시에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통기타 신드롬이 일었고, 김민기는 그러한 문화 변혁의 선두자격 인물로 손꼽힌다.
1970년대
1970년 김민기가 활동하던 YWCA의 포크동아리 '청개구리'에서 김민기의 음악적 동반자인 양희은을 처음 만났다.
1971년 대학교를 휴학하고 <아침 이슬>, <가을 편지>, <꽃 피우는 아이>를 작곡하였다. 《김민기 1집 - 아하 누가 그렇게/길 (김민기 노래모음)》을 시작으로 솔로 가수 겸 작곡가의 삶을 시작했다. 앨범 1집 발매부터 가수, 작곡가로서 빛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김민기의 앨범은 대중음악계의 기념비적인 앨범이라 찬사받는다. 김민기는 정치적 행보를 밝히지 않는 가수였지만, 그의 노래는 1970년 정치사에 맞물려 그의 음악 행보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누렸다. 현실 인식을 담백하게 담아 낸 김민기의 노래는 당시 통기타 세대, 저항세대로 불렀던 젊은 세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동시에 억압과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72년 앨범 발표 이듬 해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 부르기를 지도하다가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유신 정권 시절 김민기의 노래들이 유신 저항 운동에서 부르기 시작하면서 보안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김민기의 앨범 1집 노래인 <꽃 피우는 아이>, <아침 이슬>이 금지되고, 1집 앨범이 전량 압수되었다. 그러나 <아침 이슬>은 70-80년대에 저항문화를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하였다. 지금까지도, 한국 정치사에 맞물려 변혁적인 사건 때마다 김민기의 노래를 부른다.
1972년 양희은과 함께 <백구>, <새벽길>, <작은 연못> 등 한국 통기타 음악계의 걸작 앨범을 발매한다. 당시 젊은 세대의 혁명적 낭만주의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1973년 김지하가 희곡을 쓴 연극 《금관의 예수》의 전국 순회 공연에 참여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래 '금관의 예수'를 작곡했다.
1974년 소리굿 《아구》의 극본을 썼다.
1975년 당국에 의해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됐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는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됐지만 이 노래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라고 말했다.[11]
1978년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사, 작곡하여 테이프로 발매하였다. 정권의 제대와 감시의 대상이었던 김민기는 '언더그라운드'에서 불법 인디 카세트 테잎을 발매한다. (1970년대의 시대적 배경은 동일방직 노조 탄압 사건, 전태일 분신 사건 등 공장산업의 발달로 인한 '노동자'의 급증과 이에 따른 사회적 저항의 맥락이 전제하였다.)
<상록수>: 가수 양희은이 1979년 1월 20일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하여 널리 알려졌다. (김민기 버전 <상록수>: youtu.be/KsaNs_hLpSk)
1980년대
1984년 <공장의 불빛> 이후 활동이 금지되어 소작농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문승현, 김창남, 김광석, 김보성 등 대학 노래패 출신의 사람들이 김민기를 중점으로 모여 음반을 제작한다. 진보적인 성향을 포함한 곡은 정부 검열로 발매하지 못했다. 세상에 나온 곡은 <갈 수 없는 고향>, <그루터기>, <내 눈길 닿는 곳>,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등이 있다. 이 음반은 당시 1970년 통기타 문화의 젊은 세대들이 1980년에 접어들며 더욱 활발해진 대학 운동권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이 음반의 제목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다. 시민항쟁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이 앨범 이후 발매한 안치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약 70만 장을 판매라는 대중적인 열화를 맞이하였다.
군사정권 당시 음반 발매 및 음악 활동을 제재하였지만, 노태우 정권 시절 남북 공연단 교류 행사의 공연단 구성을 부탁받아 마지막곡으로 쓸 <철망 앞에서>를 작곡하였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인의 넋두리로 이루어진 가사로, 김민기가 군 생활 시절 정년 퇴임을 앞둔 선임을 위하여 작곡한 곡이다. 군 내에서 급속히 노래가 퍼져나가 국방부에서 '군 사기 저하'로 분류해 노래를 금지하였다. 이후 소위 운동권의 가요라고 불리며 저항 세대들의 교과서적 노래가 되었다.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군에서 금지되어 있던 이 곡을 진압군이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모습이 뉴스에 슬쩍 지나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이 시위대가 저걸 투사의 노래로 불렀다. 두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노래라는 것이 참 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
1990년 한겨레 신문사와 공동으로 음반과 공연, 노래 모음집을 한데 모은 <겨레의 노래> 사업을 지휘하였다. 김민기는 활동 금지 이후 음악 및 음반 발매 지휘만을 하였지만, <겨레의 노래>에서 부른 <아침 이슬>을 김민기가 직접 노래하였다.
1991년 학전에서 중국 조선족 창작 가곡, 동요를 모은 음반을 제작한다. 다양한 중국 교포들의 예술을 국민에게 선보여 민족적 정서의 고취를 위해 기획하였다.
1993년, 김민기가 직접 노래를 부른 <김민기 1.2.3.4> 음반을 발매하였다.
LA 올림픽에서 순위에 들지 못한 선수들의 비극과 경쟁 사회의 그림자를 담은 MBC 다큐의 테마곡 <봉우리>를 작사, 작곡하였다. 올림픽의 빛과 그림자라는 다큐멘터리 주제를 당시 작가였던 송지나 작가에게 조언하였고, 송지나 작가는 테마곡 작곡을 부탁하였다.
↑ 가나다1991년 유니세프 국제어린이음악제 한국예선대회, KBS 창작동요대회, 노래는 내친구 연말결선대회, 1992년 유니세프 국제어린이음악제 한국예선대회, 1993년 제11회 MBC 창작동요제에 출장하였다. 김민기 음반에 참여한 때에는 서울세륜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서울관악초등학교 재학 당시에 조선일보 소년소녀합창단에서 활동했고, 1989년 KBS 전국어린이동요대회 연말결선대회, 1990년 제8회 MBC 창작동요제, KBS 창작동요대회, 1991년 KBS 창작동요대회에 출장하였다. 김민기 음반에 참여한 때에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1991년 유니세프 국제어린이음악제 한국예선대회, KBS 창작동요대회, 1992년 유니세프 국제어린이음악제 한국예선대회에 출장하였다. 김창완의 음악 활동에도 참여하였고, 김민기 음반에 참여한 때에는 서울강덕초등학교 6학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