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심하굽타
나라심하굽타(굽타 문자 : 후나족을 격퇴시키다당나라 승려 현장에 따르면 당시 나라심하굽타는 후나왕 미히라쿨라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3][4] 현장은 결국 나라심하굽타가 말와의 야소다르만과 함께 알촌 훈족을 북인도 평원에서 몰아냈다고 전하고 있다.[5] 한 세기 후인 서기 630년에 현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미히라쿨라가 발디티야(굽타의 통치자 나라심하굽타 발라디티야일 수도 있음)라는 마가다의 왕이 피신한 섬을 제외한 모든 인도를 정복했지만, 미히라쿨라는 나중에 목숨을 건진 인도 왕에 의해 마침내 사로잡혔다고 기록했다. 그 후 미히라쿨라는 왕위를 탈환하기 위해 카슈미르로 돌아갔다고 한다.[6][7] 나라심하굽타의 말와 총독이었던 바누굽타도 이 분쟁에 연루되었을 수 있다. 슈라마나적 자선 활동굽타 왕조는 전통적으로 힌두 왕조였다.[8] 그러나 후대의 작가 파라마르타는 나라심하굽타 발라디티야가 대승 불교 철학자 바수반두의 영향을 받아 성장했다고 주장한다.[8] 그는 날란다에 가람을 세웠고, 또한 300피트(91미터) 높이의 비하라와 불상을 만들었는데, 현장에 따르면 그 불상은 "보리수 아래에 세워진 위대한 비하라"와 유사하다고 한다. 대방광보살장문수사리근본의궤경(c. 800년경)에 따르면, 나라심사굽타 왕은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참선을 통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8] 현장도 가람 건설을 의뢰한 발라디티야의 아들 바즈라가 "신앙에 대한 확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했다.[9]:45[10] :330 그의 점토 인장은 날란다에서 발견되었다. 날란다 인장에 언급된 그의 왕비의 이름은 슈리미트라데비이다. 그의 아들 쿠마라굽타 3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주화
각주
출처
|
Portal di Ensiklopedia Du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