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당시에는 우체국이 현금 수송 업무도 담당했기 때문에 우편차를 노리는 강도가 잦았다. 따라서 우체국에도 무기가 있었다. 폴란드 침공이 시작될 당시에는 Wz. 35 대전차 소총 1정, Wz. 28 경기관총 3정, Vis 권총 40정에 더불어 소총 여러 자루와 수류탄 여러 개가 우체국에 있었다. 당시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에는 단치히 자유시 국적의 폴란드인 직원 43명과 폴란드 제2공화국그디니아(Gdynia), 비드고슈치(Bydgoszcz) 등지에서 온 폴란드인 직원 10명이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인 건물 관리인과 그 부인, 10살짜리 딸(Erwina Barzychowska)도 건물에 있었다. 폴란드인 지휘관은 바르샤바 공과대학(Politechnika Warszawska)을 졸업한 수도 기술자 예비역소위(폴란드 제2공화국에서는 대학생들은 장교 계급을 부여받았다.) 콘라트 구데르스키(Konrad Guderski)가 맡기로 했다.
전투
이들은 폴란드의 방어 계획에 따라 방어전에 나섰다. 이들이 폴란드 우체국에서 버티고 있는 동안 폴란드군 육군의 포모제 군(Armia Pomorze)이 단치히에 지원군으로 오는 것이 당초 작전 계획이었다. 하지만 포모제 군은 서쪽(오스트포메른)과 동쪽(단치히, 오스트프로이센)에서 밀려오는 독일군에게 양쪽에서 공격받고 있었기에 폴란드 우체국을 구원할 상황이 아니었다.
폴란드 우체국의 당시 모습, 왼쪽에 있는 문이 정문이다.폴란드 우체국의 현재 모습, 왼쪽에 있는 문이 정문이다.폴란드 우체국에 대한 친위대의 ADGZ 장갑차를 동원한 공격
나치 독일의 공격 계획은 양면 공격이었다. 소규모 부대를 정문으로 보내서 공격하고 본대는 건물 오른쪽 측면에 있는 벽을 통해 공격하기로 했다.
첫번째 공격은 우체국 정문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독일 공격대 2명이 죽고 7명이 부상당하면서 실패했다. 두번째 공격은 건물 오른쪽에 있는 사무실 벽을 부수려고 시도했으나 지휘관 콘라트 구데르스키가 수류탄을 던져서 격퇴당했다. 하지만 수류탄을 던지는 와중에 콘라트 구데르스키는 전사했다.
이후 9월 1일 오전 11시에 나치 독일무장친위대와 돌격대, 단치히 자유시 경찰등은 75mm 보병포 2문을 가져다가 벽을 부수고 우체국 진입을 시도했지만 폴란드인들의 저항이 강해서 우체국 진입 작전이 실패했다.
독일 측은 오후 3시에 모든 공격을 멈추었다. 폴란드인들에게 항복할 시간을 2시간 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은 항복을 거절했다.
그 사이 독일인들은 105mm 곡사포 1문을 준비하고 공병들은 무너진 우체국 벽 밑으로 600kg 짜리 폭발물을 설치했다.
최후 통첩 시간이 지나자 결국 오후 5시에 폭발이 일어났다. 부서진 벽으로 독일 공격대가 포 세 문의 지원을 받으며 재진입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공격이 성공적이었다. 살아남은 폴란드인들은 지하로 내밀렸다.
오후 6시가 되자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독일 공격대는 지하에 휘발유를 붓고 화염방사기로 이들을 공격했다. 독일 측의 화공으로 폴란드 직원 5명이 산채로 불에 타버렸다 (전사자 명단: Brunon Marszałkowski, Stanisław Rekowski, Bronisław Szulc, 나머지 두 명은 신원미상).
결국 오후 7시가 되자 지하에 있던 생존자 전원이 독일에 항복했다.
한편, 폴란드 우체국장 얀 미혼(Jan Michoń)은 독일인들에게 백기를 들고 대표로 항복을 하려했지만 독일인 병사의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얀 미혼(Jan Michoń) 우체국장과 함께 유제프 봉식(Józef Wąsik)이라는 우체국 직원도 항복하려는 도중 독일인 병사의 총에 맞아 죽었다(한편 유제프 봉식이 화염방사기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투 이후
6명은 전투 중 전사했고 2명은 항복 이후 독일군의 오인 사격으로 죽었다.
부상자 16명 중 6명은 부상 후유증(5명은 전신 화상, 1명은 두개골총상)으로 인하여 병원에서 죽었다. 그 중에는 건물 관리인의 열 살 먹은 딸, 에르비나 바지호프스카(Erwina Barzychowska)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신 화상으로 병원에서 죽었다.
1991년8월 28일, 이 곳에서 공사를 하던 중 히틀러에 의해 처형당한 우체국 직원 38명의 유해가 발굴되었다.("W tym miejscu odnaleziono w dniu 28.08.1991 r. szczątki 38 obrońców poczty polskiej w Gdańsku którzy zostali rozstrzeleni przez hitlerowców w dniu 05.10.1939 r.")
재판과 처형 과정
프리드리히 에버하르트 장군의 독일 60 보병사단에서 군사 재판을 담당했다. 재판은 두 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939년9월 8일에는 부상을 입지 않고 포로로 잡힌 28명에 대한 단심 군사 재판을 열었다. 이후 9월 30일에는 부상을 입었다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온 10명에 대한 단심 군사 재판을 했다. 결국 38명 전부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들 38명은 현역 군인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