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1861년 제작한 한반도의 지도이며, 지도첩이다. 3건이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A], 2008년에는 대동여지도 목판이 대한민국 보물 제1581호로 지정되었다.[3][4] 근대적 측량이 이루어지기 전 제작된 한반도의 지도 중 가장 정확한 지도이다. 〈청구도〉의 자매편으로 내용의 첨삭이 이루어졌다. 지도의 구성〈대동여지도〉는 동여도와 마찬가지로 가로 80리, 세로 120리를 한 개의 방안(方眼)으로 하여 한 개 면(面)으로 하고, 2개 면은 한 개 도엽(圖葉)인 목판 한 장에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대동여지도는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이고, 제책하였을 때의 면수는 213면이다. 그러나 여기에 부록 격인 지도유설·도성도·경조오부도 등이 첨가되었기 때문에 실제 도엽은 126목판[5] 이고, 전체 면수는 227면이다. 전체 크기는 가로 19판, 세로 22층(22첩이라고 표시하기도 한다)이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가로 360cm, 세로 685cm다. 이는 지도의 대량 보급을 염두에 둔 제작 기법으로, 동서 19판을 연폭으로 남북 22첩을 계속 인접하면 한반도 전체의 지도가 되게끔 하였다.[6] 한편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21첩인데 이는 다른 간본의 제22첩에 수록된 제주도 부분이 제21첩의 추자도의 서쪽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21첩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7] 한편 한양이, 〈청구도〉에서는 두 면에 걸쳐 있었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한 면의 중앙 부위에 위치하여 한양을 둘러싼 경계가 모두 수용되었다. 이는 당시의 수도권의 지역적 범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대동여지도〉에서는 각 층의 도엽을 동에서 서로 연폭(連幅)으로 길게 잇고 이것을 병풍식으로 접어 모두 22층으로 하는 분첩절루(分帖折壘) 또는 분첩절첩(分帖折帖)의 방법으로 제책하여 지도첩이 되게 하였다. 이때 책의 크기는 가로 20cm, 세로 30cm로서 당시 서지류의 크기와 비슷하게 만들어 책처럼 보관할 수 있다. 이 지도의 제작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참고하였으며, 위도 측정에 다소 오차는 있으나 서양 지도학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고 한국의 전통적인 지도학을 대성한 것이다. 목차대동여지도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있다.[7]
지도의 표기![]() 제1첩의 10면에 표기된 '지도표'에서는 지도에 사용된 범례를 적고 있다. 여기서는 총 14개의 항목을 22개의 서로 다른 기호로 표기하였고 채색도 하였는데, 이 때 사용된 색과 채색법은 지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세계 지도학 통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에서 〈한국의 지도학(Cartograhpy in Korea)〉 부분을 집필한 미국의 지도학자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는 《대동여지도》가 조선의 지도학적 명확성을 향상시켰다고 평가한다.[7]
지도의 축척〈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김정호가 제작한 지도는 100리를 1척(尺)으로, 10리를 1촌(寸)으로 한 백리척(百里尺) 축척의 지도이다. 그러나 당시의 1촌 1보(步)가 현재의 몇 센티미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축척을 계산하기는 어렵다. 종래에는 조선 시대의 10리를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4킬로미터로 계산하여 축척을 1:160,000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동지지》와 《속대전》에서는 “주척(周尺)을 쓰되 6척은 1보이고 360보는 1리이며 3600보는 10리로 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이용하여 이우형(李祐炯)·성남해(成南海) 등은 축척을 1:216,000으로 보았다. 위의 문장을 확장하면, 1리는 21,600촌이며, 백리척에 맞추어 비교하면 1촌으로 10리, 곧 216,000촌(=3600(보)×6(척)×10(촌))을 나타내게 된다. 이는 곧 이론상의 축척이 1:216,000임을 뜻하며, 실제 축척도 그와 비슷하다. 〈대동여지도〉와 다른 지도 비교김정호가 제작한 세 지도, 곧 〈대동여지도〉와 〈청구도〉, 〈동여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청구도〉가 필사본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오류를 막으려고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대동여지도〉의 주기(註記)의 수는 〈청구도〉의 15,485개에서 13,188개로 줄었으며, 이는 총 2,297개 줄어들었다. 다만 몇몇 주기, 곧 하천·누정(樓亭 : 누각)·진보(鎭堡)·포(浦, 항구)·부곡(部曲)·교(橋, 다리)·평주(坪洲)·목장·리(里) 항목은 늘어났다. 〈동여도〉는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가장 자세하며, 또한 이 지도는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에 앞서 제작한 선행 지도이기도 하다. 주기 내용을 비교하면, 산악·하천·방면 항목은 〈동여도〉가 〈대동여지도〉보다 훨씬 많으나, 역원·창(倉)·진보 등의 항목은 두 지도의 기재 내용이 비슷하다. 전체적으로는 〈동여도〉가 총 18,376개로 〈대동여지도〉의 총 13,188개보다 5,548개나 많다. 〈대동여지도〉의 특징〈대동여지도〉는 한국 고지도를 집대성한 최고의 옛 지도이다. 이 지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목판
멸실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던 대동여지도의 목판이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이 목판은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목판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11매로 가로 43cm, 세로 32cm의 목판에는 양면에 표제 및 24도엽이 판각되어 있는데, 〈대동여지도〉의 전체 126도엽 가운데 5분의 1에 해당한다. 목판의 재질은 피나무이며, 목판에는 교정된 흔적이 있는데 1861년(철종12) 초간본 완성 이후 여러 차례 오류를 시정하였다. 목판은 1864년 인쇄되었던 고종원년 갑자본의 원형으로 판단된다.[9] 숭실대학교에서 가지고 있는 판목은 함경도 함흥지방의 것으로 성불사, 철산, 삼장산이 판각되어 있다.[10] 목판의 빈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지도의 여러 면을 판 하나에 몰아넣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대동여지도의 7층 1면(북청군 남부) · 8층 6면(룡천군 서부) · 13층 6면(황해도 남부의 섬들)은 목판 하나에 같이 새겨져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의 판본 중에는 무의도가 강릉 앞바다에 잘못 찍혀 있는 것이 있는데, 이를 통해 13층 1면과 5면이 같은 목판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일화1898년 일본 육군이 경부선을 부설할 목적으로 조선의 지리를 몰래 측량하기 위해 일본인 측량기술자 1,200명과 조선인 200~300명을 비밀리에 고용하여 전국을 측량하여 5만분의 1 지도를 300부 만들었다. 그 뒤 대동여지도의 존재를 알게 된 그들은 그 지도가 자신들이 힘들여 제작한 지도와 별 차이가 없음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11] 방송 출연지난 2015년 5월 24일에 방영되었던 TV쇼 진품명품(1000회 특집)에서 25억원이라는 역대 최고의 감정가를 기록하여 이전 전일상영정및한유도(2011년 7월 24일 814회)가 세웠던 기록 15억원을 갈아치웠다. 같이 보기
각주
참고 자료
외부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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