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평국(東平國)은 전한에서 설치한 중국의 옛 제후왕국이다. 처음에는 제동국(濟東國)이었으며, 이후 대하군(大河郡)이 됐다가 동평국이 됐다. 이후 왕국이 폐지되며 동평군(東平郡)이 됐다.
전한
한나라에서 원래는 양나라에 속한 지역이었으며, 경제 중5년(기원전 145년) 양효왕 사후 양나라를 다섯으로 분할해 새로 제동나라를 두고 효왕의 아들 제동왕 유팽리에게 봉한 것이 동평국의 역사의 시작이다. 유팽리가 죄를 지어 재위 29년(기원전 119년) 봉국이 폐지되면서 한 조정의 관할로 들어가 대하군(大河郡)으로 바뀌었다. 선제가 아들 동평사왕을 감로 2년(기원전 52년)에 동평왕으로 봉하면서 대하군은 동평국이 됐다.[1][2][3] 대하군이었을 때인 천한 4년(기원전 97년) 노나라의 왕자후국 둘 곧 영양(寧陽)과[4] 하구(瑕丘)를 얻었으며 왕국이 되면서 후국을 거느릴 수가 없어 영양후국은 태산군에, 하구후국은 산양군에 반환했다.[5] 동평사왕이 죄를 지어 건시 2년(기원전 31년)에 번·항보 2현을 삭감했고[6] 3년 후인 하평 원년(기원전 28년)에 성제가 돌려줬다. 건평 3년(기원전 4년) 동평양왕이 죄를 지어 자살하면서 동평국은 폐지되고 동평군이 됐다. 원시 원년(1년) 왕망이 애제의 정치를 뒤집으면서 동평양왕의 태자 유개명에게 동평국을 다시 세워줬다. 거섭 2년(7년), 동평왕 유광이 아버지 유신과 적의의 반란에 연루돼 주멸되면서 동평국은 폐지됐다.[3]
평제 시기에 시행된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호구 13만 1,753호·인구 60만 7,976명이 있었다. 다음 속현 목록은 한서 지리지를 따른 것으로, 원연·수화지간(기원전 8년 무렵)의 현황으로 여겨지며, 총 7현이다. 철관이 있었다.[1]
39년(후한 광무제건무 15년) 광무제의 아들중 한명인 유창(劉蒼)이 동평공으로 책봉되고 2년 후인 41년(후한 광무제 건무 17년) 동평왕으로 승격되었다. 이로 인해 동평국(東平國)으로 승격되었다. 84년(후한 장제원화 원년) 동평왕 유창의 아들 유상(劉尙)이 임성왕으로 책봉되며 임성, 항보, 번현 3현이 임성군으로 분리되었다. 140년(후한 순제영화 5년) 당시 동평국은 7성 79,012호 448,270명을 거느렸다.[10][11]
현명
한자
대략적 위치
비고
무염현
無鹽縣
타이안시 둥핑현 남동 무염촌(無鹽村)
동평륙현
東平陸縣
지닝시 원상현 북 12km 문하(汶河) 남쪽 이관집촌(李官集村) 일대
현 경내에 함정(闞亭), 당양정(堂陽亭)이 있었다.
부성현
富城縣
타이안시 둥핑현 북동
장현
章縣
타이안시 둥핑현 동평진(東平鎭) 일대
수장현
壽張縣
타이안시 둥핑현 동평호(東平湖) 동남 동평호운하 동안
본래 수양현(壽良縣)이었으나 광무제시기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현 경내에 당취(堂聚)가 있었다. 현 경내에 치밀성(致密城)이 있었는데 과거 중도(中都)였다. 또한 현 경내에 양곡성(陽穀城)이 있었다.
유유가 후연을 공격해 연주를 수복한 이래 동평군은 송나라 연주의 속군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명제태시연간 회수이북 전역이 북위로 편입된 이후 회음군지역으로 옮겨졌다. 그 이전까지 동평군은 5현 4,159호 17,295명을 거느렸다. 동평군에서 하구까지 수로, 육로로 500리, 수도인 건강까지 수로로 2,000리, 육로로 1,400리 거리였다.[12]
469년 강평현이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현 경내에 강성(剛城)이 있었다. 556년 폐지되었다.
수
590년(수 문제개황 10년) 운주(鄆州)가 설립되었다. 이 운주는 고평군, 복양군과 과거 제음군에 속했던 일부 현을 통폐합하여 만들어졌고, 607년(수 양제대업 3년)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동평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때문에 그 이전의 동평군과 달리 수나라의 동평군은 타이안시와 허쩌시 사이의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당시 동평군은 6현 86,090호를 거느렸다.[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