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년 ~ 1866년 9월 5일)는[1] 개신교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선교사다.[2] 한국 이름은 최난헌(崔蘭軒)이다.[1] 영국 웨일즈 출신이며 선교차 내한하였으나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엮여서 순교하고 말았다. 기독교 출신 역사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토마스 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읽고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3] 생애어린 시절웨일스 라예다에서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의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 목사는 영국 회중교회의 사역자였다. 런던 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대학과정과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보다는 선교에 뜻을 두고 부인과 함께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倫敦傳道會)의 파송을 받고 1863년에 중국 청나라로 떠났다. 그러나 상하이에 도착후 부인 케더린은 동료 선교사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고 유산한 뒤 사망하고 말았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던중에 런던선교회 중국 지부장인 뮤어헤드의 사립학교 엥글로-차이니즈라는 학교의 교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했다. 지도부와도 뜻이 맞지 않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둥성 지푸로 가서 세관에 취직했다. 조선 선교세관에서 일을 하던 중에 선교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났는데, 이는 산둥에 주재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영향 때문이었다. 또한 박해를 피해 산동성으로 피난 온 조선 천주교인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듣게 되었고 조선에 대한 선교의 뜻을 품게 되었다. 1865년, 조선으로 가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관에 사표를 낸 후 윌리엄슨이 제공한 여러권의 한문성경을 가지고 배에 승선했다.[4] 1865년 가을에 황해도 연안에 도착한 토머스는 한문성경을 나누어주며 선교도 하고 천주교 신자들도 만나 한국어도 열심히 배웠다.[5] 약 두달 반 정도가 흐른 어느날 심한 폭풍에 휩쓸려 타고 온 배가 만주 해안으로 표류하게 되었고, 부득히 북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북경에서는 런던 선교회 산하 학교에서 학장 서리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그의 관심은 온통 조선 선교에 있었다고 한다.[6] 순교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순교하자 이를 항의하러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자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 대신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에 항해사 겸 통역으로 탑승하여 1866년 8월 9일에 다시 조선으로 향했다.[6] 제너럴셔먼 호는 8월 14일에 충남 서해안에 도착하였다.[7] 제너럴셔먼호는 8월 하순에 대동강으로 진입하며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조선 관리들은 서양과의 교역이 국법으로 금지된 것이므로 불가하니 돌아갈 것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제너럴셔먼 호는 이에 불응한 후 대동강을 계속 거술러 올라가며 수로를 탐사하고 불법으로 평양시민들에게 선교를 하였다. 이런 서양인들의 행위를 조선 관리 이현익(李玄益)이 제지하자 그를 붙잡아 감금해 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된 평양성 관민(官民)들이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어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제너럴셔먼 호는 소총과 대포를 마구 쏘아 관민들을 죽거나 다치게 했고 사태가 점점 악화되었다.[8] 8월 21일 경부터 큰 비가 계속 내려 대동강 수위가 높았으나[9] 비가 그치고 수심이 얕아지자 제너럴셔먼 호는 9월 5일 모래톱에 좌초되고 말았다.[10]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鐵山府事) 백낙연(白樂淵) 등과 상의하여 화공전을 펼쳐 제너럴셔먼 호를 불태워 격침시켰다. 이로인해 승무원 23명 중 상당수가 불 타 죽었고 일부는 물에 뛰어들어 강변으로 헤엄쳐 나왔으나 관군의 칼과 총에 맞아 죽었다. 이때 통역관이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관군에 잡혀 강변으로 나왔으나 성난 관민들이 달려들며 휘두르는 몽둥이와 칼에 맞아 순교했다.[1][3][11] 순교의 영향토마스 선교사는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1832년에 조선 땅을 밟았던 카를 귀츨라프(Karl Gutxlaff)에 이어 두번째로 내한한 선교사였다. 그러나 개인 자격이 아니라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내한하였으므로 그에게는 개신교 선교사로서 최초라는 영예가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한문 성경을 배포하며 선교를 하였으며 끝내는 순교하였다. 일부 기독교 출신 역사가들의 주장이기는 하나 그의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고 한다. 강변으로 올라온 토마스 선교사는 품에 있던 성경책을 대중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신에게 칼을 휘두른 박춘권에게도 성경 한권을 나누어준 뒤 사망했다고 한다.[12] 박춘권은 얼떨결에 받아들고 와서는 훗날 성경을 읽다가 개종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울러 그 때에 토머스 선교사가 나누어준 성경을 읽고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상당수가 존재한다고 한다.[3] 약력
참고 자료
같이 보기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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