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도시마스
![]() 마에다 도시마스(일본어: 前田利益 まえだ とします[*], 덴분 2년(1533년)[1] ~ 게이초 10년 음력 11월 9일(1605년 12월 18일)[2])는 센고쿠 시대 말기 ~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다. 마에다 도시이에의 의붓 조카. 어린 시절 다키가와씨에서 마에다씨의 양자로 들어갔고, 생부는 다키가와 이치마스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마에다 게이지(前田慶次) / 게이지로(慶次郎)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고 호탕하고 박력있는 반면 언제나 제멋대로 이면서도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시(노래), 악기연주, 검무, 검술을 두루두루 잘 했고 창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마에다 도시마스에게 '꽃피는 경차', '천하제일창' 등의 별명이 붙었다. 그 용맹이 일본 내에서는 삼국지 연의의 여포(呂布)와 비견되기도 한다. 개략2024년 시점에서 일본에 퍼져 있는 마에다 도시마스, 일명 마에다 게이지의 인물상은 류 게이이치로(隆慶一郎)의 소설 일몽암풍류기(一夢庵風流記)와 그것을 원작으로 하는 하라 데쓰오(原哲夫)의 만화 꽃의 케이지(花の慶次)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 원형이 된 것은 《부헨바나시키키가키》(武辺咄聞書), 《상산기담》(常山紀談), 《가관소설》(可観小説), 《옹초》(翁草) 등 에도 시대에 널리 읽혔던 부헨바나시(武辺咄)[주 1]에 그려진 일화들로, 이들을 통해서 형성된 인물상이 현대에 되살아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일본사》(大日本史)의 속편인 《대일본야사》(大日本野史)에서도 「임협전 ・ 마에다 도시타카 전」(任侠伝・前田利太伝)으로써 제275권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고, 우키요에(浮世絵)로도 그려지는 등 에도 시대에는 나름대로 지명도가 꽤 있었다고 여겨진다.[4]《대일본야사》에서는 이미 마에다 도시이에를 목욕탕으로 불러들여 장난을 쳐놓고 준마 하루카제(松風)를 타고 도망쳤다거나, 우에스기 집안(上杉家)에 출사하면서 「다이후헨모노」(大ふへん者)라는 기치를 썼다가 꾸지람을 들었다거나 하는, 현대에 널리 알려진 일화들이 많이 실려 있다. 한편으로 그 인기에 반해 역사상의 인물로써 마에다 도시마스의 사적을 뒷받침하는 1차 사료는 적다. 특히 마에다 집안을 뛰쳐나오기까지의 구체적인 동향이나 일화는 마에다 집안 관련 사료에서는 거의 확인할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 이케다 고이치(池田公一)는 「게이지로에 관한 사료들은 마에다 집안의 '금기'로서 이미 (게이지가 마에다 집안을) 뛰쳐나간 직후 '암매장'되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그 정도로 게이지로의 「가부키」로 점철된 파천황적인 행동이 도시이에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음을 보여준다」고 평하였다.[5]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에도 시대부터 여러 부헨바나시로 널리 다루어지면서 현대 일본에서도 소설 · 만화 · 게임 등으로 마에다 게이지(마에다 도시마스)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가나와 휘가나(仮名) 즉 통칭은 소헤이(宗兵衛), 게이지로(慶次郎/慶二郎/啓次郎), 게이지(慶次) 등이다. 휘는 도시마스 외에도 도시사다(일본어: 利貞)、도시타카(일본어: 利卓, 일본어: 利太), 도시히로(일본어: 利大), 도시오키(일본어: 利興) 등으로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현대 일본 역사책 등에서는 도시마스(利益)[주 2] 또는 도시타카(利太)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게이지 자신의 자필로는 게이지로(啓二郎, 마에다 게이지 도중일기), 게이지(慶次, 倉賀野綱秀宛書状), 도시사다(利貞, 亀岡文殊奉納詩歌, 게이지 본인이 소장했다고 알려진 술병) 뿐이다. 게이지 본인의 자필 외로 당시 사료를 통해 확인되는 것은 게이지(慶二, 마에다 도시이에가 보낸 서장), 도시타카(利卓, 野崎知通의 유서)이다. 利益, 利太, 利大, 利興 등의 표기들은 2차 사료 이후의 기술들에서 보인다. 생몰년《가가 번 사료》(加賀藩史料)에서는 「게이초(慶長) 10년 11월 9일 마에다 게이지 도시타카(前田慶次利太)가 사망하였다. 이때 나이 일흔 셋이었다」(慶長十年十一月九日前田慶次利太、没す。時に年七十三)라고 되어 있다. 출전으로 《고거적록》(考拠摘録) ・ 《상화자원》(桑華字苑) ・ 《잡기》(雑記) ・ 《중집잡담》(重輯雑談) ・ 《삼호기》(三壷記) ・ 《가관소설》(可観小説) ・ 《무고암기》(無苦庵記) ・ 《가가 번 역보》(加賀藩暦譜) ・ 《마에다 씨 계보》(前田氏系譜)라는 사료명이 열거되어 있고, 그의 사망한 해에 관한 기재는 《고거적록》에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게이지가 태어난 해를 역산할 수는 있지만, 게이지가 태어난 해가 언제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그 기재가 없다. 한편으로 19세기 초두에 성립된 요네자와(米沢)의 향토 사료인 《요네자와 이인담》(米沢里人談)에서는 「게이초 18년 6월 4일에 병사하였다」(慶長十八年六月四日病死), 《요네자와 고지류찬》(米沢古誌類纂)에서는 「게이초 17년 6월 4일에 도모리(堂森)에서 병으로 죽었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태어난 해에 대해서 《요네자와 사담》(米沢史談)에서는 「덴분 10년(1541년) 무렵에 비슈(尾州) 가이도 군(海東郡) 아라코(荒子)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생애양아버지 마에다 도시히사(前田利久)는 마에다 도시하루(前田利春)의 장남으로 오와리 국(尾張国) 아라코 성(荒子城, 일본 아이치 현 나고야 시 나카가와 구 소재)의 성주였다. 친아버지는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의 일족인데, 비정되는 인물로는 여러 설이 있어서 일본 학계에서도 확정된 것이 없다. 일설에는 가즈마스의 종형제, 또는 조카인 다키가와 마스우지(滝川益氏), 다키가와 마스시게(滝川益重)、가즈마스의 형 다카야스 노리카쓰(高安範勝), 또는 도시마스가 가즈마스의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 아들이 없었던 도시히사가 아내의 친정인 다키가와 씨로부터 동생인 야스카쓰(安勝)의 딸의 사위로써 도시마스를 데려다 양자로 삼았다고도, 친어머니가 도시히사에게 재취한 것이라고도 한다. 에이로쿠(永禄) 12년(1569년)에 노부나가로부터 「도시히사에게 아들이 없고 병약하므로 『武者道御無沙汰』하는 상태가 있어」(『村井重頼覚書』)라는 명목으로 도시히사는 은거하게되었고, 그 동생인 도시이에(利家)가 오와리 아라코 2천 관(貫)의 땅(약 4천 석)을 잇게 되었다. 때문에 도시마스는 양아버지를 따라 아라코 성을 떠나게 되었다. 오와리 소재 아쓰타 신궁(熱田神宮)에는 덴쇼(天正) 9년(1581년) 6월에 아라코의 주인(住人)인 마에다 게이지로(前田慶二郎)가 봉납했다고 전하는 「末□」라는 명(銘)이 있는 다치(太刀)가 남아 있다. 또한 《을유집록》(乙酉集録)의 「尾州荒子御屋敷構之図」에는 아라코 성의 동남쪽에 동서로 20간, 남북으로 18간 되는 넓이의 「게이지 님의 집터」(慶次殿屋敷)가 기록되어 있다. 덴쇼 9년(1581년) 무렵에 노부나가 앞으로 여러 차례 나아가 노토(能登) 1국을 다스리는 다이묘(大名)가 된 도시이에를 의지하여 그에게 출사하게 되었다. 또 도시이에로부터 도시히사・도시마스 부자에게 7천 석이 주어졌는데, 도시히사가 2천 석, 도시마스가 5천 석이었다. 덴쇼 10년 6월 2일(1582년 6월 21일),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이 일어났다. 마에다 집안의 사료인 《가택기》(加沢記)에는 이때 도시마스는 다키가와 세의 선두가 되었다. 덴쇼 12년(1584년)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에서는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가 공격해 온 스에모리 성(末森城) 구원에 나섰다. 또한 이듬해 5월에는 삿사측에 돌아선 기쿠치 다케카쓰(菊池武勝)가 성주를 맡고 있던 아미 성(阿尾城)에 입성하여 이 성의 탈환에 나선 진보 우지나가(神保氏張) 등의 군세와 교전하였다(《스에모리키》). 이때의 도시마스의 신분에 대해 성주 아니면 성대(城代, 성주 대리)였다는 견해도 있는데[주 3] 실제로 성에 머무른 것은 5월에서 7월 무렵까지 석 달 정도였다고 여겨진다.[6] 덴쇼 15년(1587년) 8월 14일, 의붓아버지 도시히사가 사망하고 도시마스의 적남 마에다 마사토라(前田正虎)가 도시이에에게 출사하고 도시히사의 봉지는 그대로 2천 석이 주어졌다. 덴쇼 18년(1590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이 시작되고 도시이에가 호쿠리쿠도(北陸道)의 총직(惣職)을 명받게 되어 출정하게 되자 도시마스도 이를 따랐고, 이어 도시이에가 무쓰(陸奥) 지방의 검전사(検田使) 임무도 명받게 되면서 도시마스 또한 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덴쇼 18년(1590년) 이후, 도시마스는 마에다 집안을 뛰쳐나온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도시이에와의 불화라는 설,[주 4] 도시히사의 죽음을 계기로 마에다 집안과의 연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등의 설도 있지만 않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한편 도시마스의 적자인 마사토라를 비롯해 그의 처자들은 도시마스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교토(京都)에서 로닌(浪人) 생활을 하면서 사토무라 죠하(里村紹巴) ・ 쇼시쓰(昌叱) 부자나 구조 다네미치(九条稙通) ・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등 다수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다고 한다. 다만 가인(歌人) 「사쇼」(似生)는 덴쇼 10년(1582년)에는 이미 교토에서의 렌카카이(連歌会)에 출석한 기록이 《렌카소모쿠로쿠》(連歌総目録)에 있어서, 마에다 집안을 뛰쳐나오기 전부터 교토에서 문화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덴쇼 16년(1588년)에는 우에스기 집안(上杉家)의 가신(家臣)인 기도 겐사이(木戸元斎)의 저택에서 열린 렌카카이(連歌会)에 출석한 것 외에도 렌카카이에 드문드문 얼굴을 마주치곤 했던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斎)의 렌카 모음집(連歌集) 《겐지코고렌카》(玄旨公御連哥)에는 연도 미상의 「五月六日, 前田慶次興行於和泉式部(誠心寺)」라고 해서, 도시마스 본인이 주최한 렌카카이에 유사이가 출석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훗날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가 에치고(越後)에서 아이즈(会津) 120만 석으로 이봉되는 게이초(慶長) 3년(1598년)부터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가 벌어진 게이초 5년(1600년)까지의 사이에 우에스기 집안(上杉家)에 사관하였고, 신규 고용된 로닌 집단인 조외중(組外衆)의 필두로써 1000석을 받았다. 한편 게이초 9년 8월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続) 서장에는 「홋코쿠(北国, 호쿠리쿠)로 마중하는 사자를 보냈고, 가스가 모토타다(春日元忠) 앞으로 곧 도착하게 될 것이니 기쁘다. 저택을 짓는 것은 편안하게 하면 된다. 마냥 무리하게 조작은 필요없다」라고 하여, 이것이 도시마스 고용에 관한 서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7]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하세도 성 전투(長谷堂城の戦い)에 출진하여 공을 세웠다고 한다. 서군(西軍)의 패퇴로 우에스기 씨가 30만 석으로 감봉되어 요네자와(米沢)으로 옮기게 되자 이를 따라 요네자와 번에 출사하였다. 요네자와에서는 가네쓰구와 함께 《사기》(史記)에 주석을 붙이고, 와카(和歌)나 렌카(連歌)를 읊는 등 유유자적 생활을 보냈다고 전해진다(우에스기 집안이 소유하고 있던 《사기》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도시마스가 주석을 달았다는 《사기》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불명이다). ![]() 마에다 게이지의 만년을 둘러싸고, 현존하는 일본의 관련 사료들이 기록하고 있는 바가 제각기 다르다. 가장 구체적인 것은 노자키 도모미치(野崎知通)의 유서(遺書)로[주 5] 우에스기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해왔으나, 해가 지나서 쓰카에(痞)의 병이 발생하고 보양을 위해서라 칭하고 야마토 국(大和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상경하여 「범혹」(犯惑)에 이르는 일이 잦았고, 급기야 마에다 도시나가(前田利長)의 명으로 야마토 국 가리메(刈布)에 칩거하게 되었다. 그뒤에는 불문(仏門)에 들어 스스로를 「류사이켄 후벤사이」(일본어: 龍砕軒不便斎)라 하고 게이초 10년(1605년) 11월 9일에 그 땅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곳의 안라쿠지(安楽寺)에 한 사묘(廟)를 지어서 「류사이켄 후벤사이 이치무안슈」(龍砕軒不便斎一夢庵主)라고 새긴 너비 넉 자, 높이 다섯 자의 석비(石碑)가 세워졌다고 한다(현존하지 않는다). 또한 「마에다게이지토노텐」(前田慶次殿伝)에서는 刈布에 「가리메」(カリメ)라는 발음 토가 붙어 있어서, 일본의 역사 연구자인 이마후쿠 다다시(今福匡)는 이곳을 당시에는 「카리후」(カリフ)라고 읽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 안라쿠지가 있는 우다시(宇陀市) 우타노후루이치바(菟田野古市場)의 북쪽, 오사와 지구(大沢地区)나 미타 지구(見田地区)에 있는 「카리우」(カリウ)가 그 옛 땅이 아닐까 하는[8] 견해를 보이기도 했다. 한편 『가가 번 사료』(加賀藩史料)에 인용된 「가가 번 역보」(加賀藩歴譜), 「마에다 씨 계보」(前田氏系譜)에서는 우에스기의 영지인 아이즈에서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같은 우에스기의 영지이되 아이즈가 아닌 요네자와에서 마에다 게이지가 사망하였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 『가관소설』(可観小説)로, 기사 말미에 「米沢にて病死しけるとなむ」[주 6] 이 요네자와설과 지론을 함께하는 것이 요네자와의 향토사료들로 『요네자와 고지류산』(米沢古誌類纂)에서는 요네자와 근교의 도모리에 은거하였고 게이초 17년(1612년) 6월 4일, 도모리의 기모이리 타로효에(肝煎太郎兵衛)의 집에서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도시마스의 유해는 기타데라 정(北寺町)의 이치카인(一花院)[주 7]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이치카인은 이후 폐사되었고 당시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도모리 젠코지(堂森善光寺)에 마에다 도시마스의 공양탑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는 비교적 최근인 1980년에 세워진 것이다. 다만 『요네자와 고지류산』(米沢古誌類纂)에서는 「위패(牌)[주 8]는 젠코지에 있다」라고도 쓰여 있고, 최근에는 젠코지에서 마에다 게이지의 공양제(供養祭)도 올리고 있다.[9] 인물・일화![]() 인물
일화
각주내용주
출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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