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루이스 라이스는 마히쉬마티를 구 마이소르주(현재의 카르나타카주)에 위치한 곳으로 식별했다. 그의 주장은 마하바라타에 근거했는데, 마하바라타는 사하데바가 마히쉬마티로 가는 길에 카베리강을 건넜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남부 카베리 외에 만다타 근처에서 나르마다강과 합류하는 더 작은 카베리강도 있다.[2]
마하바라타는 마히쉬마티를 아반티 왕국과는 다른 별도의 왕국의 일부로 언급한다.[2]사바 파르바(2:30)는 판다바의 장군 사하데바가 마히쉬마티를 공격하여 그 통치자 닐라를 물리쳤다고 명시한다.[2] 마히쉬마티는 아그니가 왕의 딸과 결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아그니에 의해 보호받았다. 아그니는 심지어 마히쉬마티의 미혼 여성들에게 평생 한 남편과만 살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다.[14] 마히쉬마티의 닐라 왕은 쿠루크셰트라 전쟁의 지도자로 언급되며, 비슈마에 의해 라티로 평가받았다. 그의 갑옷은 파란색이었다(Mbh 5:19,167).
하리밤사(33.1847)는 마히쉬마티의 창시자를 사한자의 아들이자 하이하야족을 통해 야두의 후손인 왕 마히슈만트라고 명명한다. 다른 곳에서는 이 도시의 창시자를 라마 (힌두교)의 조상인 무추쿤다라고 명명한다. 그는 리크샤 산맥에 마히쉬마티와 푸리카 도시를 건설했다고 명시한다.[2]
라구밤사는 마히쉬마티가 레바강(나르마다강)에 위치했으며, 아누파 지방의 수도였다고 명시한다.[2]
파드마 푸라나(VI.115)에 따르면, 이 도시는 마히샤라는 인물에 의해 세워졌다.[15]
불교 경전인 디가 니카야는 마히쉬마티를 아반티의 수도로 언급하는 반면, 앙굿따라 니카야는 우자이니가 아반티의 수도라고 명시한다.[17] 마하-고빈다 숫딴따 또한 마히쉬마티를 아반티의 수도로 명시하며, 그 왕은 벳사부였다. 아반티의 수도가 우자이니에서 마히쉬마티로 일시적으로 이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
디파밤사는 마히사라고 불리는 영토를 언급하며, 이를 마히사-랏따("마히사 지방")라고 설명한다. 마하밤사는 이 지역을 만달라라고 묘사하며, 마히샤-만달라라고 부른다. 5세기 불교 학자 붓다고사는 이 영토를 라탐-마히삼, 마히샤카-만달라, 마히쉬마카 등 다양한 용어로 칭한다. 존 페이스풀 플리트는 마히쉬마티가 "마히샤"라고 불리는 부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 지역의 수도였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는 마하바라타의 비슈마 파르바에서 남부 왕국(즉, 빈디아 산맥과 나르마다강 남쪽)으로 묘사되는 "마히샤카"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2]
숫타니파타는 바바리의 제자들이 프라티슈타나에서 우자이니로 여행할 때 마히쉬마티가 경로상의 도시 중 하나였다고 명시한다. 산치의 비문은 마히쉬마티의 순례자들이 산치의 스투파를 방문했음을 언급한다.[2]
↑Harihar Vitthal Trivedi (1991). 《Inscriptions of the Paramāras (Part 2)》. Corpus Inscriptionum Indicarum Volume VII: Inscriptions of the Paramāras, Chandēllas, Kachchapaghātas, and two minor dynasties. 인도 고고학 조사국. 175–1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