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복음서(Gospel of Peter)는 기독교의 정경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외전복음서의 하나이다. 3세기의 교부 문서에 언급되고 있지만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19세기 말에 예수의 수난극의 부분이 발견되었다.
개요
'베드로의 복음서'는 3세기의 교부 문서에 언급되고 있어 기독교의 정경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외전에 속하는 복음서로서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19세기 말,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책자 안에, 그 일부로 보이는 사본이 발견되었다. 사본은 8-12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예수의 수난극 중 재판의 마지막 부분에 시작해, 책형과 매장, 부활의 장면이 말해져 갈릴래아 호수에서 베드로들의 앞에 부활한 예수가 모습을 보이기 직전에 중단되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 초기에 저술해진 '베드로의 복음서'의 일부가 아닐까 여겨진다.
원래의 '베드로의 복음서'는 '마태오의 복음서' 등과 같이,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수난, 부활까지를 적은 복음서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고 보이지만, 현재 알려지는 것은 상기 사본에 있는 수난극의 부분 뿐이다.
헤롯은 정경에서는 '루카의 복음서'에서만 등장하지만, 다른 장소에 있는[2]. 어느 정경 복음서에도, 예수는 대사제 저택, 최고 법원이나 총독 관저 등을 차례로 돌림 된다.
빌라도는 먼저 손을 씻어 퇴석해, 헤롯이 판결을 내린다.
정경 복음서에서는, 일치해 빌라도가 (마지못하면서) 최종적인 판결을 내린다. 다만, '마태오의 복음서'의 빌라도는 손을 씻어,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 너희의 문제다.'라고 선언해, 민중은 '그 피의 책임은 우리와 자손에게 있다.'라고, 그 책임을 맡는다[3].
마태오에서는, 십자가 상의 예수가 숨을 거두었을 때에 많은 사망자가 소생했다는 기술이 있다[7]. 그러나, 마태오가 소생한 사람들은, 다음 다음날의 예수의 부활 때까지 무덤에서 대기하고 있다[8].
현현
발견된 사본은 그 후가 부족하고 있지만, 갈릴래아 호수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아르파요의 아이레비가 함께 있는 곳까지 쓰여져 있으므로, 이 후에 부활한 예수가 모습을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이 부분은 '요한의 복음서'[9]에 상당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요한에서는 이는 현현의 3번째이다. 마르코, 마태오, 요한의 3개에서는 최초로 부활한 예수가 현현하는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들로 하고 있다.
최초의 현현이 여성들이 아니고 베드로들인 것은 '루카의 복음서'[10],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11](이 개소는 아마 남성만을 센 것이라고 생각된다. 성서를 보면 인원수로 꼽히는 것은 정해져 남성 뿐이기 때문이다)과 일치한다.
의의
외전의 복음서로서는 나그 함마디 문서에서 발견된 '토마스의 복음서'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초기의 문헌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이에 대해, '베드로의 복음서'는 적어도 발견된 부분을 보는 한, 정경의 4개의 복음서와 중복하는 기술이 대부분으로, 이들 4개의 복음서를 참조해 쓰여진 것은 아닐까 여겨져서 중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2년, 론 카메론 (Ron Cameron) 등은, 4개의 복음서와는 독립한 자료인 '수난 이야기'를 상정해, 그것을 기초로 '베드로의 복음서'가 쓰여졌다고 하는 설을 주창했다. 존 도미니크 크로산 (John Dominic Crossan)은 카메론의 '수난 이야기'를 '십자가 복음서'라고 불러, '마르코의 복음서'나 Q자료와 함께, 다른 3개의 복음서가 쓰여지는데 자료가 되었다고 보았다. 복음서의 자료 가설의 새로운 전개를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예수의 죽음에 대한 로마 제국과 (당시의) 유태교 (지도자)의 책임론의 원점을 아는 재료로도 될 수 있다고 크로산은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