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밀라노에서 스테파노 비스콘티와 발렌티나 도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1346년부터 그의 작은 아버지인 조반니 비스콘티가 다시 불러들인 1349년까지 망명 생활을 해왔다. 1350년 9월 27일, 베르나보는 베로나의 군주인 마스티노 2세와 타데아 다 카라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베아트리체 레지나 델라 스칼라와 혼인을 하며, 두 도시 간의 정치, 문화적 동맹을 구축하였다. 그의 음모와 야망은 교황 우르바노 5세와 피렌체, 베네치아, 사보이아와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1354년에 조반니의 죽음으로, 베르나보는 그의 형제들인 마테오와 갈레아초와 함께 밀라노의 권력을 이어받았다. 베르나보는 베네치아와 국경을 마주한 동부 지역(베르가모, 브레시아, 크레모나, 크레마)을 받았다. 밀라노 공국은 세 형제들에게 차례대로 통치를 받았다. 잔혹했던 마테오가 1355년 형제들에 의해 살해당하였고, 그의 재산은 그 둘이 나눠가졌다.
신성 로마 황제에게 모욕을 준 후인 1365년에 황제의 대리인인 마르크바르트 폰 란데크를 사로잡으면서 밀라노 공격이 미루어졌다. 1360년에 그는 아비뇽에 있던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카를 4세의 비난을 받았다. 그 결과로 발생한 분쟁은 갈레오토 1세 말라테스타가 이끄는 제국군에게 산루필로(San Ruffillo)에서 패배하며 종결되었다(1361년 7월 29일). 1362년에 그의 자매의 남편인 우골리노 곤차가가 사망한 것이 그가 만토바를 공격하게 되는 원인이 되게 하였다. 여러 곳과 전쟁중이던 그해 12월에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중재를 통해 신임 교황 교황 우르바노 5세에게 휴전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교황령 도시인 볼로냐 반환을 무시하고 아비뇽에서 볼로냐를 스스로 증여하였으며, 1363년 3월 4일 그는 그의 아이들과 함께 다시 한번 파문을 당하였고 자식들 중에 암브로조는 교황군 사령관인 힐 데 알보르노스에게 붙잡혔다. 1364년 3월 13일 평화 조약과 함께, 비스콘티는 500,000 플로린을 지불하는 대신에 점령했던 교황령을 모두 떠났다.
1368년 여름에 비스콘티는 베로나의 칸시뇨리오 델라 스칼라와 동맹을 하여, 여전히 우골리노 곤차가가 지배하던 만토바를 공격했다. 이 상황은 이후 같은 해에 베르나보와 신성 로마 황제 간의 협약을 통해서 안정화되었다. 2년 후, 그는 레조를 포위하여, 1371년에 곤차가에게서 얻었다. 모데나와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과의 전쟁이 밀라노를 증오하던 교황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다시 발발하였다. 1370년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컸던 싱글 아치 다리인 트레초 다리 건설 명령을 내렸다.
1373년, 교황은 베르나보와 갈레아초에게 파문장(실큰 코드에 회색빛의 실을 봉한 양피지)을 보내기 위해 두 명의 사절들을 보냈다. 극도로 화가난 베르나보는 두 사절을 체포한 다음 그들이 가져온 양피지와 실, 실큰 코드를 먹을때까지 그들을 풀어주지 않았다.[1] 그는 밀라노에 역병이 발발했음에도 제정신이 아닌 힘으로 억누르며 견뎌내었다.[2] 1378년에 제노바를 상대로 발발한 키오자 전쟁에서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그의 군대는 1379년 발비사뇨(Val Bisagno)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폭정과 과도한 세납으로 베르나보는 밀라노인들을 격노하게 하였고, 그는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속 운명의 피해자로서 독재자의 교훈예화에 등장하기도 했다.[3] 그는 1385년 조카인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에게 폐위되었고 트레초 성에 감금된 그는 그 해 12월에 독살되고 만다.
베르나보의 장례 조형물은 아내의 조형물, 그의 기마상과 함께 사전인 1363년에 제작되었다. 보니노 다 캄피오네가 제작한 이 조각상들은 산 조반니 인 콘카 교회에 배치될 예정이었지만, 현재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에 위치해있다.
자녀
베르나보와 그의 아내 베아트리체
베르나보는 슈테판 2세 폰 바이에른과 동맹이였으며, 그의 딸 세 명이 슈테판의 후손들과 혼인을 했다. 그는 그의 아내 사이에서 17명의 적출을 두었다:
아이모네테 비스콘티(Aymonette Visconti) : 루이 1세 드 베르통 데 발베(Louis I de Berton des Balbes)과 혼인
안글레시아 비스콘티(Anglesia Visconti, 1439년 10월 12일 사망) : 1400년 1월 자뉘 드 뤼지냥 키프로스 국왕과 혼인하였지만, 자녀를 두지 못하고 1407년/1409년에 이혼하였으며, 1411년에 그는 샤를로트 드 부르봉과 재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둔다.
잠마스티노 비스콘티(Giammastino Visconti, 1370년 – 1405년 6월 19일) : 클레오파 델라 스칼라(Cleofa della Scala, 1403년 사망)와 혼인하여, 3명의 자녀를 두었다. 클레오파는 칸그란데 2세의 딸이다.
루차 비스콘티 (1372년 – 1424년 4월 14일) : 켄트 4대 백작인 에드먼드 홀랜드와 혼인했으나 자녀는 두지 못했다.
↑For this, see Irving Wallace, David Wallechinsky and Amy Wallace, The Book of Lists 2(1980), Ealing, London, Elm Tree, 1980 and Corgi, 1981. ISBN0-552-11681-5 ; p 147, although here it says the incident occurred in 1370.
↑밀라노에서 그의 질병 통제에 관해선, Rosemary Horrox의 The Black Death(1994) III.65, p 203. 참고
↑초서는 1378년에 어린 리처드 2세를 대신하여 프랑스를 상대로 잉글랜드의 전쟁 활동에 대한 존 호크우드경과 베르나보의 지원을 얻기 위해 롬바르디아로 보내졌었다. 그의 His epistola metrica III.29는 조용히 베르나보에게 보내졌었다. (Ernest H. Wilkings, The 'Epistolae Metricae' of Petrarch, (Edizioni di Storia e Letteratura), p. 11.
↑" 베르나보 비스콘티는 약간의 결혼 의식을 통해 돈니나 델 포리의 자녀들을 적출로 만들었다" (H.S. Ettlinger, "Visibilis et Invisibilis: The Mistress in Italian Renaissance Court Society", Renaissance Quarterly,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