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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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년 1월 17일~1790년 4월 17일)은 "미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of the United States) 중 한 명이다. 그는 특별한 공적 지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프랑스 군(軍)과의 동맹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국의 독립에도 기여했다. 최초로 민간형 비행기를 발명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계몽사상가 중 한 명으로서, 유럽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피뢰침, 다초점 렌즈, 민간형 비행기, 뇌파측정기, 홀로그램 기술 등을 발명하였다. 달러화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10달러)하고 벤저민 프랭클린(100달러) 두 명에 불과하다. ![]() 생애![]() 유년기대장장이이자 농부인 토머스 프랭클린과 제인 화이트의 아들이자 벤저민 프랭클린의 아버지인 조사이어 프랭클린은 1657년 12월 23일 영국의 노샘프턴셔주 엑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아비아 폴저는 제분업자이자 교사인 피터 폴저와 전에 계약 하인 (Indentured servant)이었던 메리 모릴의 딸로서 1667년 8월 15일 매사추세츠주 낸터킷에서 태어났다. 폴저의 자손 J.A. 폴저는 19세기에 폴저스 커피를 설립했다. 조사이어 프랭클린은 2명의 부인과 함께 17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는 엑튼에서 대략 1677년 그의 첫 번째 부인으로 앤 차일드와 결혼했고 1683년 보스턴에 그녀와 함께 이주했다. 그들은 이주하기 전에 3명의 아이가 있었고 이주 후 4명을 더 갖는다. 그녀의 죽음 후에, 조사이어는 새뮤얼 윌러드의 주례로 올드 사우스 미팅 하우스 (Old South Meeting House)에서 1689년 7월 9일 아비아 폴저와 결혼했다. 그들의 8번째 아이인 벤저민은 조사이어 프랭클린의 15번째 아이이자 10번째 막내 아들이었다. 1706년 1월 17일에 보스턴에서 비누하고 양초를 만드는 집안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10살 때 집안 형편으로 인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형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열정적인 노력 덕분에 능숙한 인쇄기술을 습득하게 되었고, 또한 글쓰는 솜씨를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1723년, 그의 나이 17세 때에 프랭클린은 가출하여 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로 떠나게 된다. 그 곳에서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빠른 시간에 인쇄업자로서 성공했고, 1730년에는 24살의 나이로 인쇄소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1732년 프랭클린은 《가난한 리처드의 연감》(Poor Richards Almanac)이라는 책을 발간해서 대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정치활동1731년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도서관을 설립하여 도서관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736년에 펜실베이니아의 하원의원으로 임명되어서 1751년부터 1764년까지 국회의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펜실베이니아 시 체신장관 대리로 일하였으며(1737~53), 그 결과로 전 식민지의 체신장관 대리로서, 우편 업무에 관한 사항을 많이 개선시켰다.(1753~74) 과학1748년 그의 사업이 많이 번창함에 따라서, 프랭클린은 과학에 뜻을 두어 사업을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봉급을 받으면서 과학을 탐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740년대 초기에 그가 발명한 난로(프랭클린 스토브)는 아직도 생산되고 있으며, 그 이후에도 아주 많은 실험을 행하였다. 1752년에 그의 유명한 실험인 '연 실험'을 행하였고, 번개가 전기를 방전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번개를 구름에서 끌어내기 위해 금속으로 만든 뾰족탑을 세우자고 제안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과로, 또 프랭클린의 실용적인 면의 재현으로, 그의 피뢰침이 발명되었다. 후에 복초점 렌즈가 발명되는데 이것도 프랭클린의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1753년 영국 왕립학회(Royal Society) 회원으로 선정되었고, 코플리 메달을 받았다. 그해 전 식민지 체신장관 대리가 되어 우편제도를 개선하였고 54년 올버니회의에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참석, 최초의 식민지 연합안을 제안하였다. 57년 펜실베이니아의 이익을 위하여 교섭을 벌일 목적으로 영국에 파견되어 식민지에 자주과세권을 획득하고 귀국하였다. 64년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인지조례의 철폐를 성공시켰다. 75년 귀국하여 제2회 대륙회의의 펜실베이니아대표로 뽑혔고 76년 독립선언 기초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프랑스로 건너가 아메리카-프랑스동맹을 성립시키고, 프랑스의 재정원조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83년 파리조약에는 미국대표의 일원이 되었다. 사망1785년 여름에 프랭클린은 신임 공사 토머스 제퍼슨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10년간 살던 프랑스를 떠나 독립국이 된 미국으로 돌아왔다.[1] 벤저민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 필라델피아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흉막염으로 사망했다.[2][3] 장례식에는 약 2만 명이 참석했으며 필라델피아의 크라이스트 처치 묘지에 묻혔다.[4][5]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프랑스 혁명의 제헌 의회는 3일간의 애도 상태에 들어갔고, 프랭클린을 기리는 추모식이 전국에서 거행되었다.[6] 가족사항사생아 였던 윌리엄 프랭클린은 1730년 2월 22일에 출생하였다. 그의 모친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필라델피아에서 교육을 받고 30세에 런던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사생아인 윌리엄 템플 프랭클린을 낳게 된다. 그의 모친도 알려져 있지 않다. 왕당파였던 그는 미국 독립 전쟁에서 부친인 벤자민 프랭클린과 결연하게 된다.[7] 독립전쟁에서 패배하자 윌리엄은 뉴저지 주 총독에서 물러나 퍼스 앰보이에 있는 감옥에서 6개월 동안 수감된다. 커넥티컷에서도 2년동안 수감된 뒤 1778년에 뉴욕으로 가게 된다. 그 곳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영국군이 뉴욕에서 물러나자, 그도 영국으로 가 런던에서 머물었다. 정치적 업적정치가로서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자치에 대해 영국의 관리들과 토론을 벌일 때 식민지의 대변인으로 활약했고,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했으며, 미국 독립전쟁 때 프랑스의 경제적·군사적원조를 얻어냈다. 또한 영국과 협상하는 자리에서 미국석 대표로 참석해 13개 식민지를 하나의 주권 국가로 승인하는 조약을 맺었으며, 2세기 동안 미국의 기본법이 된 미국 헌법의 뼈대를 만들었다. 특히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기초한 '미국독립선언문'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 서명을 하였으며,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헌법에 기도에 대한 문항을 넣으려 하였으나 무산되었다.[8] 프랭클린은 독립선언서(1776),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1778), 영국과의 평화 조약(1782), 미국 헌법(1787)에 모두 서명한 유일무이한 인물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1] 약력
명언겸손
경험
계절
공부
노소
노력
도전
독서
돈
동물
명예
믿음
사랑
성공
습관
시간
실패
언어
용서
음식
이기심
인내
인생
일
자기관리
자신감
자유
정의
죽음
지식
지혜
친구
행복
희망
기타
저서대표 저서 (1) :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Autobiography)배경벤저민 프랭클린의 저서 중 가장 주목 받은 작품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 - 덕에 이르는 길이다.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로 미국의 객관적인 계몽주의 정신의 표상이었던 그는 청교도와 비슷한 Plain style로 글을 썼으며 문학에 반하는 정신으로 문학은 항상 실용적인 목적으로 창작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 자서전은 그야말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 나가는 작품이다. 자서전 중간 부분에는 에이블 제임스 씨가 프랭클린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등장한다. 이 편지는 프랭클린에게 자서전을 쓰라고 권유하는 내용이다. 또 후에 벤저민 보건이 프랭클린에게 보낸 편지내용이 등장한다. 앞에 나온 에이블 제임스가 보낸 편지 내용과 마찬가지로 벤저민 보건도 프랭클린에게 자서전을 꼭 쓰라고 설득한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으로 인해 행복과 위대함을 얻는데 출신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개인의 인격에 영향을 주어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사회나 가정의 행복을 촉진시키며, 많은 젊은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프랭클린이 쓴 자서전을 읽게 되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벤저민 보건은 프랭클린을 설득한다. 특징자서전의 특징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인생지침으로 삼았던 13가지 덕목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철학은 "평소에 근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의 13가지 덕목들의 계율들을 정의하였다. 조그마한 수첩을 만들어 매일 저녁에 그 날 하루의 행동을 생각하고, 각 계율과 관련하여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해당란에 흑점을 찍도록 하는 등의 자세한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자서전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시작하며, 두번째 부분은 1784년에 프랑스 대사관에서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은 현대에도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최근에는 벤자민이 휴대하고 다녔던 수첩 형식에 착안하여 만든 《프랭클린 플래너》라는 일정 관리수첩이 성행하기도 한다. 대표 저서 (2): The Way to Wealth『The Way to Wealth』는 1758년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쓴 글이다.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Poor Richard's Almanac』의 서문이며, 바른 저축과 소비의 미덕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려 노력하였다. 소개되는 몇가지 조언들은 "근면함과 인내심으로 생쥐는 돌을 뚫으며, 밧줄을 갉아 두 동강 낸다.”는 것이다. 프랭클린은 게으름과 나태로 인한 낭비를 지적하면서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또한 “우리는 언젠가 묘지에서 충분히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다.”에서 잠을 배우지 못합니다." 라고 하며 본인이 경험하고 그것에서 나오는 교훈을 겸허히 수용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같이 보기기타프랭클린 연구소펜실베이니아 주(州)의 필라델피아에 있는 과학기술연구소로, 1824년에 설립되었으며 바톨 연구기금, 프랭클린 연구 센터, 프랭클린 연구실험실, 프랭클린 과학박물관, 천문관, 벤저민 프랭클린 국립기념관 등을 포함하고있다. 1884년 미국 최초의 국제전기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1916년에는 최초의 대륙간 전화통신의 공개실험이 이루어진 곳이다. 1930년대초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이름을 따서 프랭클린 연구소라 이름지었다. 각주
외부 링크
전기와 가이드
온라인 저서
자서전
예술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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