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이윤성친구들이윤성(민주화운동가)이윤성(李潤成, 1962년 6월 23일 ~ 1983년 5월 4일)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이자 군복무 중 의문사하였다. 성균관대학교 역사철학계열을 휴학한 후 군복무 중 보안부대에서 의문사한 사건은 당시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운동과 군 의문사 사건을 둘러싼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윤성의 생애와 사망은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생애이윤성은 1962년 6월 23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윤성의 아버지는 해방 후 월남하여 성공한 사업가로, 서울 강동구에서 예식장을 운영하였다. 5녀 1남 중 막내였던 이윤성은 특히 가족들의 깊은 애정을 받았다.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친구와의 신의, 사회적 책임감을 중요하게 여겼다. 고등학교 시절1981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윤성은 성균관대학교 역사철학계열에 입학하였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미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술반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림을 그리며 창의적인 사고를 기른 이윤성은 1학년 말 경, 웅변반에 들어가 역사와 사회 문제에 대한 고전을 읽고, 토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군부 독재의 억압과 사회 불평등에 대해 강한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대학 시절이윤성은 대학시절 초입 그림에 관심이 많았으며, 많은 다양한 친구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이윤성은 철학과 역사에 대한 지적 관심은 매우 컸다. 그는 특히 군사 정권 하의 정치적 억압과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적 영향에 대해 깊은 비판적 사고를 가졌다. 민주주의 핵심 원칙인 평등과 대중 지배가 당시 군부 정권 하에서 처절하게 유린되는 상황에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지식인의 양심을 숨기는 것이었다. 1982년 2학년 때에는 인문과학연구회의 회장을 맡아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논의를 주도했다. 그는 학우들과의 논의를 통해 민주주의와 민족, 그리고 통일에 대한 열망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였다. 성균관 대학교는 2003년 2월 25일 이윤성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였다.[1] 군 복무 및 의문사이윤성은 1982년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서울 종로에서 열린 가두 시위에 참여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다. 1982년 11월 6일에 강제로 경기도 의정부 101보충대에 징집되었다. 당시 군에 입대하게 된 이유는 강제 징집이었으며, 이윤성은 부모가 60세를 넘긴 2대 독자였기에 원래 현역 입영 대상이 아니었다. 이후 강제 입대 6개월 후, 의가사제대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신병교육을 마친 후 강원도 철원 5사단 27연대 2대대 5중대 GOP에서 소총수로 근무했다. 그러나 1983년 4월 30일, 부대 검열에서 그의 관물함에서 북한의 불온 전단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경기도 연천군 205 보안부대에 연행되었다.[2] [3] [4] 205보안부대는 전부대원이 30명 남짓의 소규모 부대였다. 그는 이곳에서 월북 기도라는 엄청난 혐의로 4일간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이윤성은 결국 1983년 5월 4일 새벽 3시 30분경, 보안부대 심사실 뒤편 테니스장의 심판대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당시 심사실에서 심사를 담당한 자는 대공계장으로 군인으로 보기 어려운 비인간적인 인물이라고 한다.[5] 그 대공계장은 부사관으로 간첩수사가 주 임무였다. 군 당국은 그의 사망을 자살로 발표했지만, 이윤성의 가족은 이를 믿지 않았다. 제대가 일주일 남은 시점에 자살을 했다는 군의 보고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군의 사망 보고서에는 그가 가정불화로 신문 배달을 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윤성의 가족은 그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점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망 보고서의 또 다른 석연치 않은 점은 사망 시점이 3시 30분임에도 불구하고 을 6시 10분으로 조치하여 보고하겠다는 내용이다. 당시 사망사건을 담당했던 헌병대장은 국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의 실체적 진실을 말해줄 수 없다고 한다.[6] 당시 이윤성의 계급은 대한민국 육군 이병, 군번은 23120057이었다. 이윤성의 부친은 아들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당시 민정당 총재 권정달에게 호소하였지만, 이는 당시 대통령 전두환과 싸워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대답을 받았다.[7]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2년 2월 21일, 월북 기도혐의로 조사받던 중 자책감을 못 이겨 자살한 것으로 발표된 이윤성에 대한 군 발표와 달리,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사망한 것을 밝혔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당시 이윤성을 조사한 보안사 조사관들과 205보안 부대장 등이 이윤성이 불온전단소지와 월북기도 혐의가 아닌 운동권 출신 사병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녹화사업(특별정훈교육) 때문에 연행됐다고 진술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진상규명위원회는 이윤성이 사망한 뒤 보안사의 자체 감찰 조사가 부대원들이 이윤성이 녹화사업 때문에 연행됐다고 보고했음에도, 수사결과는 다르게 작성된 경위에 대해 박준병 당시 보안사령관 등을 조사하였다.[8] 당시 이윤성을 직접 취조한 대공계장은 월북 기도 혐의가 아니고 녹화사업이라고 증언하였다.[9] 녹화사업은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을 강제로 징집, 처벌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군사작전이었다. 이윤성 또한 이 사업의 일환으로 군에 강제 징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군사정권은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인물들을 정리하고 처벌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압박을 가했으며, 이윤성도 그러한 표적 중 하나였을 수 있다. 녹화사업녹화사업은 1980년대 초 전두환 주도의 군사정권이 자행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국가 폭력이었다. 주권자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의 위협에 대항해 만들어진 군부가 자국민을 계획적으로 살해한 전대미문의 대량살상계획이었다. 녹화사업은 1980년대 초 군사 정권이 대학생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군 복무 중 사상 교육을 하고, 이들을 학내 정보원으로 활용하려 했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자, 군사 정권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학내 시위를 원천 봉쇄하고 학생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켜 사상 교육을 실시하고, 이들을 학내 정보원으로 활용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는 일제의 독립 운동 말살 수법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최악의 반인도적 국가 폭력이었다. 녹화사업은 전두환의 지시로 1981년부터 1984년까지 주로 보안사령부에서 주도하였다. 전두환은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자행한 반란수괴로 1996년 서울지방법원 95고합1228 사건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별 사면에 의해 천수를 누림으로써, 반란수괴조차 생존할 수 있다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악영향을 초래하였다. 이는 결국 2024년 윤석열의 군사반란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공개된 토론과 협상, 다수결과 선거를 통해 국가를 운영한다는 민주 공화국의 최고 이상을 철저히 부정하고, 총칼을 동원한 폭력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고는 결국 오늘날 끊임없는 극우 세력의 등장과 관료들의 정파적 이익을 위한 헌법파괴의 선례가 된 것이다. 녹화사업의 주요 실무자는 다음과 같다:박준병 (보안사령관): 녹화사업 시행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사업 전반을 총괄했다. 최경조 (대령): 녹화사업의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서의남 (중령): 녹화사업의 실제적인 운영을 담당했다. 황영시 (육군참모총장):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아 녹화사업에 필요한 후속 조치를 명했다. 윤성민 (국방장관): 관련 사병들을 전방에 배치하도록 지시하는 등 녹화사업을 실행했다. 실무자들의 역할: 이들은 학생 운동 관련자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군 복무 중 사상 교육을 실시하여 군사 정권에 대한 지지를 강요했다. 학생들에게 학내 동향 파악 및 정보 수집을 지시하고, 이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폭행, 협박, 고문 등 가혹 행위를 자행했다. 녹화사업과 관련된 의문사 사건에 연루되어 진상 규명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실무자들에 대한 어떤 법적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녹화사업의 조직: 1982년 7월, 보안사 3처에 대좌경의식화과(對左傾意識化課)인 5과가 신설되어 녹화사업을 전담했다. 보안사는 경기 과천과 서울 퇴계로 진양상가에 2개의 사무실을 두고 녹화사업을 진행했다. 녹화사업은 군사 정권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인권 탄압 가운데서도 가장 심각한 국가 폭력이며, 그 실무자들은 이러한 반인도적 범죄 행위에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1996년 군사반란 세력에 대한 법적 처벌에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박준병은 1심과 2심에서 무죄 방면됨으로써 대한민국 법치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군사 정권은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키고, 이들에게 사상 교육을 실시하여 군사 정권에 대한 지지를 강요했다. 군사 정권은 피해자들에게 학내 동향 파악 및 정보 수집을 지시하고, 이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폭행, 협박, 고문 등 가혹행위를 자행했다. 녹화사업의 대상은 학생운동 관련자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 및 민간인까지 포함되었다. 실행 형태는 가장 먼저 강제 징집으로, 학생 운동 관련자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군대에 입대시켰다. 군사정권은 사상 교육을 통해 군 복무 중 학생들에게 군사 정권에 대한 지지를 강요하고, 반정부 활동을 비판하는 사상 교육을 실시했다. 군사 정권은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였다. 학생들에게 학내 동향 파악 및 정보 수집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는 폭행, 협박, 고문 등의 가혹 행위를 자행했다. 군사 정권은 감시 및 사찰을 통해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찰했다. 녹화사업과 관련된 의문사 피해자이윤성(성균관대 81학번): 1982년 강제 징집되어 군 복무 중 가혹 행위와 정신적 압박에 시달렸다. 1983년 4월 30일, 의문사했다. 2021년, 법원은 국가에 이윤성 유가족에게 배상을 판결했다. 그러나 그에게 조직적, 체계적 폭력을 가했던 어떤 자들도 조금의 법적 처벌도 지탄도 받지 않았다. 김두황(고려대 80학번),[10] 정성희(연세대 81학번),[11] 최우혁 (서울대 84학번),[12] 김용권 (서울대 83학번),[13] 이진래 (서울대 77학번),[14] 최온순(동국대 81학번),[15][16] 한영현(한양대)[17][18], 한희철(서울대 79학번).[19] 이 외에도 녹화사업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이 강제 징집, 프락치 활동 강요, 고문, 폭행, 감시 및 사찰 등의 피해를 겪었다. 이들은 군 복무 중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었으며, 일부는 본의 아닌 프락치 활동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했다. 녹화사업 피해자들은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 왔다. 과거사 진실규명 위원회 등에서 조사를 진행했으며,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여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현재까지도 녹화사업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녹화사업으로 인해 학내 민주화 운동이 위축되고, 학생 사회 전체가 침체되었다. 녹화사업과 관련된 의문사 사건은 아직까지도 그 실체적 진상이 규명되지 않았다. 녹화사업은 단군 이래 유례가 없는 군부의 자국민에 대한 범죄행위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20세 전후의 어린 주권자 시민 청년들에게 국가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가장 잔인하게 반인도적으로 자행한 국가폭력이다. 그럼에도 그 어떤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피해자들과 유족들에게, 그리고 주권자 시민들에게 이러한 중대한 국가폭력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이념을 원천적으로 훼손한 결코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상처로 남아있다. 이윤성의 사망과 관련된 의혹은 2024년 1월 13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뤄졌다. 방송에서는 이윤성의 사망을 둘러싼 여러 의혹을 다루며, 그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군 당국의 공식 발표를 넘어서, 군사정권 하의 녹화사업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방송을 통해 이윤성 사건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참고 문헌이윤성 관련 기사, 《topstarnews》, 2024년 1월 13일.[22] 녹화사업 (제5공화국) - 위키백과 녹화사업(綠化事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녹화사업(비밀 공작) - 나무위키 '녹화사업'을 아시나요? - 한겨레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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