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의 경제송나라(중국어: 宋, 영어: Song dynasty)는 중세 시대를 통틀어 가장 번영하고 발전된 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는 국가였는데,[1][2] 대운하와 양자강 유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대외 무역, 그리고 국내 인구를 기반으로 한 대규모 민간 및 관영 산업은 모두 송나라의 막대한 경제력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었다. 당나라 말기~오대십국 시대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했던 중국의 경제는 송나라 시기에 들어 국민 소득이 12세기 유럽의 약 3배로 증가하는 등 절정에 이르렀다.[3] 비록 송나라는 타민족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고 1127년에 북중국을, 1279년에는 남중국마저 잃어버리면서 멸망하기는 했지만 송나라 시대는 전근대 중국사를 둘러보아도 경제·문화적인 측면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전성기를 누렸다.[설명 1] 이 시기에는 도시를 넘어 각 지역별로 시장이 급속하게 성장했고, 그에 따라 중국 시장권 역시 규모가 확장되었다. 인구와 1인당 소득의 지속적인 증가, 경제의 구조적 변화,[설명 2] 기술 혁신[설명 3]이 일어났음은 물론이다. 송나라는 이전 왕조들보다 비교적 민간 경제에 덜 간섭하는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택하면서도, 차나 소금, 술, 화약의 원재료 등 경제성이 높고 제국 안보에 필수적인 자원에 한해서는 전매제를 실시하여 특정 제조 품목과 시장 상품에 대한 정부의 독점을 행했다. 조정 국고의 대부분이 군사력에 투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 전반에 부과된 세금들은 금방 국고를 다시 채워주었으며 통화 경제의 발전을 야기했다.[4] 당대의 중국은 약 1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고 수백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가 수도인 개봉이나 임안을 제외하고도 몇개나 더 있었다.[5] ![]() 생산력의 급증과 함께, 중국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화폐 또한 발전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사용되던 동전은 송나라가 개국한 초기에도 해마다 평균 수천만 개씩 만들어냈으나, 점점 발행량이 연간 수억 단위로 증가했는데 1085년 당시에는 화폐 생산량이 연간 동전 60억 개라는 엄청난 주조량을 보여준다. 허나 이렇게 막대한 양을 찍어냈음에도 불구하고 폭증하는 수요를 완전히 따라잡지는 못하자, 동전 다음의 거래 수단으로 어음이 지목되었다. 원거리에서 무거운 동전 대신 어음 뭉치를 가져가면 되니 매우 편리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었다. 가짜 어음으로 사기를 치거나, 어음을 주니 실제 가치하고 다르거나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리하여 1024년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交子)"가 발행되었다. 혜주, 성도, 임안 등의 대도시에 지폐 발행 공장이 세워졌으며 여기서 생산된 지폐들은 사천, 섬서 지역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일부 역사가들은 서유럽이 혁신을 이루기 몇 세기 전부터 송나라 시대의 중국을 '초기 근대 경제'로 일컬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송나라의 뒤를 이은 원나라와 명나라는 이를 폐지하고 다시 정부에서 시장에 적극적으로 간섭하는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송나라인들의 유산을 무너뜨렸다. 농업![]() 장강 하류의 삼각주 지역, 소위 강남(江南)이라 불리는 지역은 예로부터 토지가 낮고 수분이 많은 저습지 지대로서 거주나 농경에 크게 불리했다. 그런데 남북조 시대 이래로 개간 작업이 진척되기 시작하여 송나라 즈음이 되면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한다.[설명 4][설명 5][설명 6] 또한 조정이 새로운 토지 개간을 완료하고 세금을 납부한 사람에 한해서 그 토지를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한 것 역시 경작지의 확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설명 7] 이리하여 송나라의 경작지는 대략 7억 2천만 무[설명 8]에 달했고, 강남 지방의 농업 생산량은 중국 역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라던가, "소주와 호주가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족해진다(蘇湖熟 天下足)"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수도 개봉의 엄청난 인구와 서북 변경 지방에 밀집적으로 분포한 군대를 뒷받침하였던 것도 사실상 강남 지방의 이러한 높은 농업 생산력이었다.[10] 신법당의 당수이자 개혁정책들을 여럿 추진한 송나라 관료 왕안석(王安石)은 1069년에 관개 시설의 확장을 장려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1076년까지 약 10,800개의 관개 사업이 완료되어 3,600만 결의 공공 및 사유 농지를 관개했다.[11] 주요 사업에는 북중국의 황하 유역 개보수, 태호 인근의 토질 개선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송나라는 농작물 생산량이 대략 3배로 증가하였으며[12] 전체 경지 면적은 128%나 늘어났다.[10] 또한 저수지·강에 제방을, 해안에 방파제를 건설했는데 이는 농지로의 물의 범람을 막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송나라 시대의 농업 수확량은 무당 약 2탄(약 110lb/50kg)이었는데, 한나라 초기에는 1탄, 당나라 말기에는 1.5탄이었다.[13] 계층의 분화송대에 이르러 당대(唐代)의 문벌 귀족은 대부분 몰락하고, 장원(莊園) 지주나 부상(富商) 등이 새롭게 대두했다. 그들은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었으며 특권을 잡아 송대 사회의 단연 중심 세력이 되었다. 또한 균전제(均田制)하의 농민은 대부분 몰락하여, 농노적(農奴的)인 소작인(小作人, 佃戶)이 되어 장원의 경작에 종사했다. 이외에 많은 자작농이 존재했지만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다가 토지를 버리고 유민(流民)·전호가 되는 사람이 많았다. 이와 같이 송대의 사회는 북위(北魏) 이래의 균전제가 붕괴되어 장원제(莊園制)와 전호제(佃戶制)를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기에 해당한다. 송대의 지방 호족(豪族)들 가운데 과거를 거쳐 관료가 된 자를 '관호(官戶)'라 했다. 송나라 조정은 당의 귀족을 대신하는 새로운 지배 계급을 형성하기 위하여, 과거제(科擧制)를 확충하고 지방에서 전지(田地)를 많이 소유하여 유력자로서의 지위를 구축하고 있던 호족들을 많이 채용해 관료로 삼았다. 그들은 당의 귀족처럼 가문(家門)을 자랑할 수는 없었지만 관료가 되면 그 집은 관호라 하여 특권적인 계층을 형성했다. 특권 중 큰 것은 면역(免役) 특권이다. 즉 촌락의 유력자는 양세(兩稅)의 징수·운반·포도(捕盜) 등의 일을 맡은 데 대하여 관호는 면제해 주었던 것이다. 그 외에 지이(支移:兩稅를 州縣으로 운반하여 바침)나 절변(折變:현물 대신 돈을 바침)을 면제했다. 이러한 면제는 토지 집적(集積)을 한층 유리하게 하고, 그러한 특권을 받기 위하여 일반 농민의 토지를 바치는 자들도 많아졌다. 그 때문에 남송에서는 일정액(一定額) 이상의 토지를 가진 자에게는 노역에 충당하려 했으나 토지 소유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호의 대토지 소유가 점점 더해 갔다. 송대의 지방 호족 대부분을 '형세호(形勢戶)'라 한다. 관호를 포함함은 물론이고, 굳이 관호가 아니더라도 지방에서 대지주로서의 재산을 모았고, 징세·치안유지 역을 짊어지고 국가의 향촌(鄕村) 지배의 일익을 담당하는 자를 말한다. 양세 부담에 있어서도 일반 호(戶)와 구별하여 취급되었다. 그들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자가 많으므로 일반적으로 호족·관료를 총칭하여 형세관호(形勢官戶) 혹은 관호형세호(官戶形勢戶)라 한다. 전호(佃戶)는 송대 이래로 관호 등의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는던 예속적인 소작인을 말한다. 송대에서는 객호(客戶)·전객(佃客)·지객(地客)·장객(莊客)이라고도 하듯이 타향에서 흘러들어온 자들이 많고, 토지·가옥은 물론 농구·종자 등도 지주에게 대여받았기 때문에 지주에 대하여 보통 이상으로 예속적인 지위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조(佃租, 소작료)는 5할 이상이며 때로는 노역에도 사역되었다. 지주와 전호 사이에는 주종(主從) 관계가 있다고 하며, 전호의 지주에 대한 범죄의 경우에는 일반보다도 중하게 벌했다. 그러나 강남이 개발되고 특히 남송에 이르러 도작(稻作)의 품종 개량이 이루어져 생산력이 증대하고 그 위에 맥작이 보급되어 수확이 전호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조전(租佃)의 관계(地主佃戶制)는 더욱더 발전해, 전호는 반드시 타향 출신뿐만 아니어도 자기의 토지를 부득이하게 지주에게 맡겨야 했지만 그대로 전호가 되어 경작을 계속하는 자들도 많이 나왔다. 이리하여 지역에 따라 전호는 서서히 지주에 대한 예속성을 벗어나고 있었다. 특히 강남 삼각주 지대의 호전(湖田)·우전(玗田)이 발달한 곳에선 전호 사이에 횡적인 연대(連帶)가 형성되어 지주의 명령을 거부하여 전조를 내지 않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완전항조(頑佃抗租)라 하여 남송 때 처음으로 나타났고 명(明)·청(淸) 시대에 들어오면 한층 격심해진다.[14] 쌀![]() 송대가 되면 벼의 품종도 매우 다양해져서, 농부들은 농부들이 지형 등의 자연 조건에 맞추어 종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설명 9][설명 10][설명 11] 특히 참파에서 들여온 점성도(占城稻, 참파벼)는 "중국의 벼에 비해서 이삭이 길고 까끄라기가 없으며, 낱알의 차이가 적고, 토양을 가리지 않고 생장한다"[16]고 일컫을 정도의 우량품종이었으며 가뭄이나 병충해에 특히 강하였다. 또한 봄에 심고 3, 4개월이 지나면 곧장 성숙하므로 교대로 이기작(二期作)이 번성하게 되었고 또 보리와 함께 이모작(二毛作)을 보급시키는 일에 공헌하는 바가 컸다. 송 진종 5년(1012)에 강남지방에 큰 가뭄이 들자, 정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복건으로 가서 점성도 3만 곡(斛)을 가져와 높은 곳에 토지가 있는 백성들을 골라서 종자를 나누어 주고, 아울러 재배방법을 조판에 새겨 인쇄하고 방을 붙여서 백성들에게 알려 재배를 확대하였다. 이로부터 점성도는 강회와 양절지방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그 후 재배하면서 다시 계속해서 개량하고 변화되었으며[17] 나중에는 중국 각지로 확산됨에 따라 전국의 쌀 생산량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남송시대의 강남동로와 강남서로에서는 경지의 8, 9할은 점성도를 심게 되었고 양절로에서도 그 재배가 번성했다. 복건, 광동방면은 진종이전 송초부터 이미 점성도를 재배하고 있었던 것 같다. 송나라 이후로도 점성도계의 여러 품종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쌀농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끈기가 가장 많은 찹쌀(糯米)도 각지에서 재배되었다. 이것은 주조의 원료로 쓰이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송나라 조정은 술의 전매를 위하여 양조원료인 찹쌀을 조세로서 징수하거나 또는 사들였다. 보리, 밀보리는 원래 화북을 주요한 산지로 하였으나, 남북조 시대부터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강남 지역의 논에서 경작되는 경우가 있었다. 북송 시대에 들어서도 보리는 각지에 심겨졌으나, 중엽에 접어들자 소주에서 보리는 베고 벼를 심어 1년에 재숙했다고 하는 사료인 원풍7년의 주장문(朱長文) 《오군도경속기(吳郡圖經續記) 권상 물산(物産)》도 보인다. 남송 시대에는 화북인이 대거 강남으로 유입됐으므로 북방의 밀가루 요리(麵食) 풍조가 강남에서도 일반화되었고, 그에 따라 밀의 수요가 증가했으며 보리의 가격이 등귀했다. 그 때문에 강남에서의 보리재배가 발달했다고 전해진다. 남송시대는 북송 시대를 계승했으므로 도시의 발달이 현저했고, 도시를 무대로 하여 화려한 소비생활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술의 수요가 상당히 증가했다. 그에 따라 송 조정은 술을 정부의 전매품으로 지정하고, 주무(관영 술양조기관)를 설치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남송에서는 더욱이 담군주고를 두어 술을 양조·판매하여 그 이익을 군비로 돌렸다. 술의 제조원료는 찹쌀과 밀이 있었는데, 그중 후자는 누룩으로 빚어 사용했다. 주무(酒務)·주고(酒庫)의 증설과 함께 찹쌀과 밀이 대량으로 소비되었다. 이 수요에 응하기 위하여 보리와 밀의 재배가 활발해졌다. 보리는 군마의 사료로서의 수요가 컸다. 남송은 금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마군이 많이 두어져 있었다. 군마의 사료의 대부분은 보리이고, 정부는 말먹이용의 보리를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민간으로부터 보리를 사들이거나 아예 가을 세금을 보리로 절납하게 했고 영전·둔전을 설치하여 보리를 경작하거나 또 황전(荒田)을 개간할 경우에 보리, 밀 재배를 권장하기도 했다. 남송에서는 북방인구의 유입도 있어 인구가 대폭 증가했기 때문에, 기근이 닥쳤을 경우에는 종래와 같이 쌀만으로 굶주린 인민을 구제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이에 밀이나 보리로 구제하는 정책이 취해졌고 따라서 보리, 밀 재배는 조정에 의하여 장려되었으며 종자 보급을 촉진했다. 장원내에서도 논에서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이루어졌다. 민유장원에서는 일반적으로 전호는 쌀을 나누어 지주에게 세금으로 납부하고 보리는 자기의 수입으로 삼고 있었다. 즉 보리와 밀 재배는 전호의 이익이 되고 있었으므로, 전호는 나아가 보리의 이모작을 생각하였다. 지주도 노복을 사역하여 보리·밀 재배의 직접경영을 하였다. 관유장원에서는 전호는 쌀, 보리를 세금으로서 관에 납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남송에서는 보리·밀 재배가 보급되고 양절·강남동서·복건·형호남의 여러 지역에서 보리가 경작되었다. 광남동서로에서는 그다지 경작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것은 기후의 관계때문일 것이다. 또 장강 이북에서도 회남동서·경서·형호북로에서 경작되고 사천에서도 많이 재배되었다. 이들 가운데 양절·강동서·복건·회남 등 여러 지역에서는 수전에서 쌀·보리 이모작이 상당히 행해졌고, 논에서는 콩·보리나 조·보리 등의 이모작이 이루어져 생산력 증진에 공헌했다. 보리·밀은 양세로서도 징수되었다. 조정에서는 지주나 중소농민에서 전호에 이르기까지 보리·밀을 경작하고 자가소비나 납세로 하고, 남는 것은 시장에서 팔았다. 쌀·보리에 대해서는 상세를 면제하고 그 유통을 장려하였고, 상인은 이를 상품으로서 매매하고 많은 이익을 거두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상당한 재부를 쌓은 사람들도 출현했다. 보리와 밀 재배의 기술 또한 진보했다. 보리밀은 주로 산지·육전·사지 등의 밭에서 경작되었고 콩 등의 이모작을 행하였다. 수전에서도 보리가 경작되었으며 쌀로 이모작을 행하였다. 수확시기가 빠른 조전이나 토지가 높은 고전에서 이모작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당시 조생종 벼의 대표품종은 점성도였고 만생종은 경도였다. 갱도(秔稻)는 비옥한 논에서 경작되는 반면, 수확량은 많지 않으나 장기간의 보존이 가능하므로 조세로서 징수되었고, 가격이 비싸 상호(上戶)의 식량이 되었다. 점성벼는 논의 비옥도와 관계없이 경작되어 수량도 많았고 가격이 저렴하여 중․하호의 식량이 되었다. 조전 내지 고전에서는 조도를 경작한 후, 보리․밀을 경작하는 이모작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보리의 파종기는 구력 8~9월에서 다음해 4~5월에 수확했다. 보리의 품종에는 쌀과 같이 조·중·만의 여러 종이나 춘맥이 있었고 음식에 적합한 것, 양주용에 적합한 것 등 각종이 있었으며, 밀의 품종에도 조·중·만의 여러 종류가 있었다. 밀기울이 두껍고 밀가루가 적은 것, 무망(無茫)한 것이 있었고 춘소맥도 있었다. 보리밀 외에 쌀보리(穬麥)도 있었다. 남송에서는 보리는 벼에 다음가는 중요한 작물이 되고 강남에서도 중요한 식량이었다. 보리와 밀 재배의 발전은 강남의 생산력 발전의 일익을 담당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넓게 본다면 중국 농업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되었다.[7] 상품 작물![]() 송대에는 차, 설탕, 오디, 인디고와 같은 상품 작물이 보편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18] 차(茶)는 송나라 때 쌀, 소금, 간장, 기름, 식초, 숯과 함께 당대의 7가지 일반적인 가정용품 중 하나가 되었다. 도시 곳곳에는 찻집이 생겨났고, 차를 마시는 문화는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차는 외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중앙아시아를 관통하여 중국에 방문한 상인들은 차를 주요 무역품으로 취급했다. 1104년 이전에는 국경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무역 가운데 1/3이 차 무역이었을 정도였다.[19] 그에 따라 차 생산지 역시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송대의 차 경작지는 당(唐)대에 비하면 무려 3배나 늘어났으며, 특히 사천 지역의 차 농업은 급속하게 상업화되었다. 강회(江淮)와 진령(秦嶺) 이남에 전문적으로 차를 생업으로 재배하는 원호(園戶)가 여럿 존재했다. 북송 초에 차를 생산하는 주(州)가 35곳이었으나, 남송 때에는 66주 242개소에 달하였다.[20] 1162년 조사에 따르면 차 농장은 전국 244개 현(縣) 가운데 66곳에 걸쳐 있었다.[21] 강서성 요주(饒州)에서 생산된 찻잎이 특히 고급으로 취급받았는데, 가장 비싼 것은 약 0.59kg 당 500전에 판매되었고 가장 저렴한 것 역시도 37전이었다.[22] 차 재배는 험준한 내륙 고지대 계곡과 같은 지형을 가지고 있어 쌀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남중국에서의 개발의 최전선에 있었다. 복건과 같은 지역은 송나라 초기에 23만 kg의 차를 생산했던 것이 1084년경이 되면 190만 kg으로 늘어났다. 대부분의 차 농장은 농촌 가정에서 운영했지만, 일부 대규모 민간~국영 농장에서는 1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소금 산업과 마찬가지로 차는 송나라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무턱대고 이를 독점하려 하지는 않았으나 선택적인 지역에서만 고도로 집중화되어 재배하는 정책은 실시하였다. 일례로 1162년 즈음을 보면 사천 외의 지역에서는 단 5개 현이 전체 차 생산량의 55%를 차지했고[22] 개중 북원(北苑)은 오직 황실만을 위해서 차를 생산하는 농장이었는데, 약 40여 종의 한정 차가 그곳에서 생산되었다. 가장 좋은 것은 부드러운 찻잎의 끝부분만 따고 가공하여 만드는 일명 용차(龍釵)였는데, 이것을 모든 찻잎 가운데 최고로 쳤으며 다른 나라의 왕족에게 선물로서 거래되기도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용차로 만든 후식거리(大龙团)는 당대에는 매우 유명한 것이었다.[23] 면화는 처음에는 해남에서 재배되었다가 곧 양광과 복건으로, 그다음에는 장강과 회수 유역에까지 도입되었으며[20] 나중에는 북중국에도 면화가 재배되었다. 면화 꽃을 모은 뒤, 이런저런 가공 과정을 거쳐 실을 뽑아낸 다음 장인들이 한땀한땀 엮어서 만드는 길패(吉貝)는 대표적인 면직물이었다.[24] 해남 지역에서 만들어내는 면직물은 그 종류가 다양하고, 천의 폭이 넓으며, 다양한 색으로 염색되었을 뿐만 아니라 용도도 다양하게 쓰이는 것이 가능해 많은 인기를 끌었다.[25] 대마도 널리 심어졌는데 직물로서 사용되었다. 소주의 동정호 인근 산지에서는 오디 농장이 번성했다. 뽕나무(桑) 농부들은 농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고,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를 사육하여 비단을 생산한 뒤 이것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사탕수수는 전국시대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재배되었던 것이다. 송대에 태호 인근의 지역들은 사탕수수의 대표적인 생산지로서 이름을 떨쳤다. 또한 복주, 명주(明州), 광주(廣州) 등지에서 재배되어 당상호(糖霜戶)가 많았는데, 이곳에서 생산된 설탕은 해외로 수출되었다. 송나라의 학자 왕탁(汪晫)은 1154년 그의 저서에서 중국 최초로 설탕 기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으며, 그 중에는 사탕수수의 재배 방법과 사탕수수로 설탕 가루를 만드는 법 등이 있었다.[26]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교외 지역에는 고부가가치 채소 농장들이 생겨났다. 남중국에서는 평균적으로 1무의 논밭이 한 사람을 부양했고, 북중국에서는 3무의 논밭이 한 사람을 부양할 수 있었던 반면에 1무의 채소 농장은 무려 세 사람을 부양하는 것이 가능했다.[27] 기타 작물벼와 밀, 보리, 상품작물 이외에도 다른 여러 작물들이 재배되기도 했다. 녹두는 송 진종대에 인도(天竺)으로부터 도입되었는데 종자가 크고 알이 많아 대단히 빠른 속도로 남북 각로에 보급되었다. 또한 수박은 원산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중동이나 신강지역에서 들어왔던 것으로 추정되며, 가장 먼저 중국 북부의 요나라로 전래되었다가 북송 말에는 하북(河北)와 하남(河南) 지방에서 보편적으로 재배하고 있었고, 남송이 건립되자 점차 회수를 넘어 중국 전역에서 재배하게 되었다.[28] 농기구와 비료농기구 및 비료 등 기타 농업 요소들도 발전했다.[29] 당나라 때 보편화되었던 철제 쟁기는 송대 들어 더욱 개량되어 ‘체도(銐刀)’ 혹은 ‘개황체도(開荒銐刀)’라는 장치가 달리게 되었는데, 이는 쟁기를 거친 황무지에서도 쓸 수 있게 해주었고 특히 회수 일대 습지의 갈대와 기타 식물들의 뿌리를 잘라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개량된 쟁기는 쟁기질을 할 때에도 더욱 신속하고 편리하였으며,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하여 단위면적당 생산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30] 용골번차(龙骨翻车)·통차(筒车)·보습·양마(秧馬)·수차(水車) 등도 널리 사용되어 농업 생산량의 증대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때까지 농사에 있어서 기계로 경작하기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였으나, 송대에 들어 북방에는 소가 없거나 그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남방의 소에 의존해야만 했다. 소가 없는 농민들은 생산물을 분배할 때 지주들에게 10분지 1의 소작료를 추가해서 부담해야 했다. 이때 주로 사용됐던 것이 답리, 쇠스랑, 곡괭이였다.
송대에 창조된 새로운 도구로 양마(秧馬)가 있다. 이것은 모내기를 할 때 사용하는 도구의 일종으로 위에 타고서 모내기를 하며 허리를 굽혀서 모내기를 하는 것보다 적지 않게 체력의 소모를 줄일 수 있었다. 양마는 대략 송 신종대에 발명되었고, 느릅나무와 대추나무로 배를 만들어 미끄러지게 하고 가래나무와 오동나무로 등을 만들어 그것을 가볍게 했는데, 배 부분은 조그만 배와 같이 그 머리와 꼬리를 치켜들고 등 부분은 마치 기와를 엎어놓은 것과 같이 하여 두 다리로 흙 안에서 뛰기에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 머리에다 모를 묶어놓고서 모내기를 했다. 하지만 이 도구가 체력의 소모를 줄이기는 하였으나 속도가 빠르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송원대는 또한 하분루종(下糞耬種)이라고 하는 파종 도구가 발명되었는데, 이는 씨를 담는 깔대기에 따로 분뇨를 거르는 체를 설치하여 누에의 똥과 섞어서 파종할 때 종자를 따라서 떨어져 종자의 위를 덮으니 사용에 더욱 편리하였다. 송대의 남방에서는 또한 운탕(耘蕩, 써레의 일종)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였다. 운탕의 형태는 나막신 같이 생겨서 실제 길이는 한 척 정도인데, 20여 개의 짧은 못을 배열하여서 이를 사용하여 논두둑 사이에 풀이나 흙을 쳐서 이들을 섞거나 빠트려 밭이 더욱 고르고 비옥하게 한다. 써레나 호미보다 성능과 효과가 좋아서 인력의 소모를 줄이고 노동생산율을 높이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31]
송나라의 농부들은 인분이 비료로서 농작물 생산에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사용하면 척박한 황무지도 비옥한 농지로 다시 탄생할 수 있었다. 송나라 시대의 학자인 진보(陈普)는 1149년 자신의 저서인 「농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32]
세금곡창지대인 강남에서는 매년 220만 석의 쌀을 생산했고, 그 외에도 호남북에서는 100만 석, 양회에서는 150만 석, 양절에서는 155만 석을 각각 생산하여 수도 개봉부로 운송하였다.[10] 500년 후의 중근세 문명인 세종대왕 시대~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선조 통치 하의 조선도 쌀 생산량은 1석에 180kg 기준으로 약 300만 석을 넘기질 못 했다. 장강 하류에서 거두어지는 세금은 송나라 국가재정 전체 수입의 40%에 해당했는데, 즉 송나라의 수입은 1,250만 석에 해당했던 것이다.[33] 1석이 50kg인 송나라를 180kg 기준으로 계산하면 337만 석인데, 전체 곡물 생산량이 세금의 10배일 경우에는 3,300만 석이다. 인구 700만명을 230만 석의 쌀 생산량으로 유지했던 16세기의 조선 문명하고 비교해 보았을 때, 인구 7,000만명을 3,000만 석으로 유지했던 송의 1인당 곡물량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영지의 생산력이 10만 석 이상은 돼야 영향력 있는 영주로서 인정받았던 센고쿠 시대의 일본도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기는 어림도 없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3,000만 석을 크게 넘지 못했으며 심지어 1620년에는 2,700만 석이라는 기록도 있다.[34] 상단, 투자 및 무역상업화![]() 송나라 대부분의 도시에서, 그곳의 경제는 대체로 시장에 있는 대규모의 관영 산업과 민간 기업들에 의해 돌아갔지만, 그밖의 교외나 농촌 지역에서는 소규모의 민간 가게들과 상인들에 의해 경제가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번성하는 경제의 수혜자인 것은 똑같았다. 자주 거래되지 않는 상품들은 은밀하게 암시장을 통해 거래되었는데, 여진족이 화북을 점령하고 금나라를 건국하자 이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일례로 1160년경에는 매년 약 7~8만 마리의 소를 밀반입하는 암시장이 존재했다고도 한다.[35] 한편 송대에는 압착유 생산 가게, 포도주 제조 상점, 지역별 소규모 제지 사업체 등과 함께 한 가족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도자기 상점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또한 여관 주인장, 점쟁이, 마약상, 비단 상인들 이외에도 여러 배경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고객들을 찾았다.[36] ![]() 잉여 농산물들을 시장에 많이 팔면 팔수록 농촌 가구들은 생활에 필수적인 숯, 차, 기름, 포도주 등을 더 많이 구매할 수 있었으며,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많은 부를 창출하기 위한 2차 생산 수단을 마련할 만큼의 자금을 모으는 것이 가능했다.[37] 때문에 농촌에서는 필수 농작물 이외에도 포도주, 숯, 종이, 직물 및 기타 상품들을 중개인을 통해 거래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37] 소주의 농부들은 누에나방을 길러 비단을 생산했으며, 복건이나 사천, 광동 지역의 농부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했다.[37] 농촌의 번영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공공 사업에 대한 기술적인 발전과 개선이 필수적이었다. 중국의 광활한 관개 시설에는 표준화되어 대량으로 생산된 물레방아와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 시스템이 사용되었다.[38] 한편 의복 또한 상업의 발달과 함께 세분화되었다. 부유층들은 비단으로 만든 가운 등을 입었던 반면, 서민층이나 빈곤한 사람들은 주로 대마와 모시로 만든 옷을 입었다. 송나라 말기에는 면화가 사용되기도 했다.[37] 이러한 상품들은 10세기 갑문의 개발과 함께 활성화된 대운하를 통해서 운반되었다. 송대의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심괄(沈括)은 1020~1030년대에 이루어진 갑문 건설로 대략 500명의 인부가 추가로 고용되었고 매년 최대 1,250,000전의 세금이 절약되었다고 기록했다.[39] 또한 그는 기존 방식은 선박 당 운반할 수 있는 쌀의 양이 300탄(17t/17,000kg)에 불과했지만 새로운 방식을 사용했을 때는 쌀을 400탄(22t/22,000kg)을 운반할 수 있다고 하였다.[39] 다른 기록에 따르면, 1080년대 송나라 관정선은 최대 700탄(39t/39,000kg)의 화물을 실을 수 있고 대형 선박들은 2탄의 화물 800개(88t/88,000kg)를 실을 수 있다고 한다.[39] 도시 생활과 비즈니스송대 들어 발전한 도시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조직적인 경제 시스템을 발전시켰으며, 이것은 다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직업과 꿈 그리고 희망을 주었다. 북중국을 잃어버린 후, 송나라의 학자 맹원로(孟元老)는 이전 수도인 개봉의 번영을 회상하면서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을 저술했다.
금융지폐와 어음이 등장했고 활발히 사용됐다. 교역국가가 과도하게 민간의 경제활동에 간여하거나 세금을 과중하게 거둬들이면 위축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송나라는 이런 관점에서 매우 균형 잡힌 정책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 연구에 의하면 송나라가 교역 상품에 대해 부과한 세금은 2~5%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국가에 의한 관리와 통제가 수월하지 않았던 시대의 조건을 고려하더라도 이는 그다지 높은 과세라고 보기 어렵다. 송나라 정부는 민간 경제 활동을 장려하여 조금씩 자주 세금을 거두는 것이 과도한 세금으로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보다 훨씬 영리한 전략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해외무역에 나간 배가 1년 만에 돌아오면 정상적인 세금을 매겼다. 하지만 5달 안에 귀국하면 세금을 깎아 주었고, 1년을 넘기면 관료들이 조사에 나섰다.[33] 철 생산량연간 철 생산량은 12만 5천t으로 산업혁명기 영국을 약간 밑도는 정도였다.[40] 같이 보기각주설명주
인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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