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레이만 샤 1세
쿠탈므쉬오을루 쉴레이만(튀르키예어: Kutalmışoğlu Süleyman, 아랍어: سليمان بن قتلمش 술라이만 이븐 쿠툴무쉬[*] 1086년 죽음)은 룸 셀주크의 창건자(재위: 1078년 ~ 1086년)이다. 보통 쉴레이만 샤 1세(튀르키예어: Ⅰ. Süleyman Şah 비린지 쉴레이만 샤[*]) 또는 쿠탈므쉬오을루(튀르키예어: Kutalmışoğlu)이라 불린다. 어린 시절셀주크의 손자인 쿠탈므쉬의 아들이다. 쿠탈므쉬는 술탄 알프 아르슬란과의 계승 전쟁에서 패배, 전사하였다. (1063년) 쿠탈므쉬의 네 아들, 쉴레이만 샤, 만수르, 알프 일리그 그리고 데블레트(또는 돌라트)는 알프 아르슬란의 포로가 되었다. 재상 니잠 알물크는 쿠탈므쉬의 자식들 모두를 처형할 것을 알프 아르슬란에게 조언했으나, 알프 아르슬란이 이를 거부하였다.[1] 1074년 경, 쉴레이만과 그 형제들은 시리아 방면에서 튀르크멘 부족들을 이끌었다. 이 당시 쉴레이만은 셀주크 제국이 아닌 파티마 왕조에 충성을 받친 것으로 보인다. 쉴레이만은 말리크샤 1세의 군대에 패배, 소아시아로 도망쳤다.[2] 룸 셀주크 국가 건설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쉴레이만은 니케아(지금의 이즈니크)에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스 사료들에 따르면,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미하일 7세 두카스는 쉴레이만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쉴레이만은 사실 니키포로스와 협력하고 있었으며, 쉴레이만의 도움을 받은 니키포로스는 1078년에 황제로 즉위하였다.[3] 이후 쉴레이만은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와 협상을 통해 드라콘 강(지금의 크르크게치트 강)을 국경으로 삼는 조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알렉시오스는 비티니아 지역과 보스포로스 해협을 튀르크 제세력들에게서 안전하게 만들 수 있었다.[2] 쉴레이만은 이를 통해 소아시아의 서부와 중부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3] 대셀주크 술탄 말리크샤는 쉴레이만의 세력을 인정하였다. 이에 압바스 왕조는 쉴레이만에게 나시륏데블레, 에뷜페바리스, 뤼큰윗딘(튀르키예어: Nâsırüddevle, Ebü’l-fevâris, Rüknüddin)의 칭호를 내렸다. 쉴레이만 역시 자신의 이름으로 주화를 발행하거나 금요예배를 진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1] 죽음하지만 쉴레이만에게 있어 소아시아는 정착지가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권토중래하여 이란을 다시 정복하고자 했다.[4] 자신의 세력을 굳힌 쉴레이만은 친척 아불 카심에게 니케아를 맡기고 동방 원정에 나섰다. 1084년, 쉴레이만은 킬리키아와 시리아 북부를 공격,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 그리고 당시 모술과 알레포를 지배하던 우카일조를 공격, 그 군주인 무슬림 이븐 쿠라이쉬를 죽이는데 성공했다.[5] 이에 위협을 느낀 시리아 셀주크의 통치자 투투쉬 이븐 알프 아르슬란과 그의 장군 아르투크는 쉴레이만을 공격했다. 1086년 6월, 투투쉬의 군대는 알레포 인근에서 쉴레이만의 군대와 전투를 치뤘고, 쉴레이만을 전사시켰다.[6] 이때 쉴레이만의 아들 클르츠 아르슬란과 쿨란 아르슬란은 포로가 되었다.[7]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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