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10회 연쇄공격스탈린의 10회 연쇄 공격은 소련 역사기록학에서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붉은 군대가 동유럽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한 일련의 전략공세작전을 의미한다. 1944년 1월 14일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를 시작으로 1944년 10월 27일 페차모-키르케네스 공세까지 있었던 주요 공세가 이 공세에 포함된다. 1944년 일련의 공세를 통해 붉은 군대는 독일 국경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고, 독일 국방군은 이 공세로 인해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크게 잃게 되었다. 용어의 유래스탈린은 1944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위대한 소비에트 10월 혁명 27주년" 기념식에서 최초로 "열 번의 타격"이란 말을 언급하였다.[2] 당시 그의 발언은 소련 최고사령부 스타브카의 공식적 전략은 아니었다. 당시 소련군의 공식 선전 전략은 "한 해에 열두 번의 승리를"이었고 이를 상징하기 위해 12 도시에서 각기 24회의 예포를 발포하였다.[3][4] 스탈린은 한 때 독실한 러시아정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성경 속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고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이주를 허락하지 않은 파라오에게 닥친 "열번의 재앙"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작전 목록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1944년 1월 14일 소련군이 레닌그라드 포위를 해제하기 위해 볼호프 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 브랸스크 전선군 일부에서 나치 독일 북부집단군을 공격하면서 시작된 공세이다.[5][6]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이 공격은 1943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되었으며, 1944년의 공격들 중 첫 번째로 시간 순으로 이루어졌지만, 스탈린의 연설에서는 두 번째로 언급되었다. 이 공격은 우크라이나에서 추축국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며, 크림반도 내에서 독일군의 고립을 초래했다. 스탈린의 연설에서 이 작전은 "우크라이나 우안 해방"이라고 불렸다.[7][8] 크림 공세크림 공세는 독일과 루마니아군을 크림반도에서 몰아내고 세바스토폴을 재탈환한 작전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크림반도를 유지하는 것이 튀르키예의 중립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고 믿으며, 추축군의 철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붉은 군대는 페레콥 이스트무스를 넘어 공격을 시작했고, 독일과 루마니아군을 신속하게 세바스토폴까지 몰아넣었다. 세바스토폴은 5월 9일에 항복했다. 히틀러는 철수 명령을 내렸지만, 대부분의 군인들은 제시간에 탈출하지 못하고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루마니아군의 막대한 피해로 인해 이 전투는 1944년 루마니아의 항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탈린은 이 전투를 '오데사 해방'과 '크림 해방'이라고 그의 연설에서 언급했다. 이 전투는 제4우크라이나전선군이 수행했다.[9] 지협 대공세레닌그라드 북쪽의 핀란드군을 목표로 한 이 작전의 전략적 목적은 카렐리아 지협에서 핀란드군을 파괴하고 핀란드를 전쟁에서, 그 후 키미강까지 진격하여[10][11][12] 소련군이 핀란드 영토로 깊숙이 진격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13] 이 작전은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카렐리안 전선군이 수행했다.[8][14] 소련군은 1941년에 핀란드군이 점령한 영토에서 핀란드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소련의 진격은 탈리-이한탈라 전투에서 멈췄다. 그보다 더 북쪽에서는 부오살미 전투와 일로만치 전투에서 핀란드가 승리하면서 소련의 추가 진격 역시 저지되었다. 이로 인해 소련은 주요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했다.[15][16] 바그라티온 작전1944년 6월 시작된 표트르 바그라티온의 이름을 딴 작전으로, 작전 당시 붉은 군대가 수행한 작전 규모 중 가장 큰 작전이었다. 이 작전으로 중부 집단군이 붕괴했다. 르보프-산도미에시 공세이아시-키시뇨프 공세제1차 이아시-키시뇨프 공세가 실패로 끝난 뒤 붉은 군대가 다시 수행한 작전이다. 발트 공세1944년 발트 3국 지역을 되찾기 위해 수행한 작전이다. 두클라 고개 전투1943년 독일군과 소련군이 두클라 고개에서 벌인 조우전이다. 페차모-키르케네스 공세각주
|
Portal di Ensiklopedia Du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