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파니야 이바니브나 투르케비치루키야노비치(우크라이나어: Стефанія Іванівна Туркевич-Лукіянович: 1898년 4월 25일 오스트리아-헝가리렘베르크-1977년 4월 8일 영국케임브리지)는 우크라이나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학자다.[1] 우크라이나 최초의 여성 작곡가다. 그의 음악은 소련에서 금지되었다.
유년기
스테파니야의 조부 레프 투르케비치와 부친 이반 투르케비치는 사제였다. 모친 소피야 코르모시프는 피아니스트로,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와 함께 카롤 미쿨리, 빌렘 쿠르츠에게 음악을 배웠다.[2]:7 그래서 온 가족이 음악에 조예가 있었고, 각자 악기를 다룰 줄 알았다. 스테파니야는 피아노, 하프, 풍금을 다룰 줄 알았다.
학생기
중간 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 자매 이레나, Lev 형제 (라켓 포함), Stefania, 1915년경
1934년 리비우로 귀향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리비우 음악원에서 음악이론 및 피아노 강사를 지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문음악인연맹 맹원이 되었다.[3]
제2차 세계대전
소련이 서우크라이나를 점령한 1939년 가을 당시 스테파니야는 리비우 오페라하우스에서 강자 겸 악장으로 일하고 있었고, 1940년에서 1941년까지는 리비우 음악원 조교수가 되었다.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면서 음악원이 문을 닫은 뒤에도 국립음악학교에서 강의를 계속했다. 1944년 봄, 리비우를 떠나 빈으로 갔다.[3] 이후 1946년 소련군을 비해 오스트리아 남부로 갔고, 거기서 이탈리아로 건너가 영국군 군의였던 나르치즈 루캬노비치(Nartsiz Lukyanovich)와 재혼했다.[5]
영국에서
1946년 가을, 영국으로 이주한 스테파니야는 브라이턴(1947년-1951년), 런던(1951년-1952년), 브리스틀 근교 배로거니(1952년-1962년), 북아일랜드벨파스트(1962년-1973년), 케임브리지(1973년-죽을 때까지)에 살았다.
1940년대 후반에 작곡에 복귀했고, 동시에 때때로 피아노 연주도 했다. 특히 1957년에는 재영 우크라이나인 공동체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를 열었다. 1959년에도 브리스틀에서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다. 그는 영국 여성작곡자음악가협회 회원이었다.
Сокіл-Рудницька М. Пам’яті Стефанії Лукіянович // Вільне Слово. – Торонто, 1977. – 9 і 16 липня. – С. 3.
Вовк В. Парастас для Стефанії Туркевич-Лукіянович // Наше Життя. – Нью-Йорк, 1992. – Ч. 5. – С. 6–9.
Стельмащук Р. Забутий львівський композитор-неокласик (штрихи до творчого портрета Стефанії Туркевич) // Музика Галичини (Musica Galiciana) / Матеріали Другої міжнародної конференції. – Львів, 1999. – С. 276–281.
Павлишин С. Перша українська композиторка // Наше Життя. – Нью-Йорк, 2004. – Ч. 1. – С. 14–16.
Павлишин С. Перша українська композиторка: Стефанія Туркевич-Лісовська-Лукіянович. – Львів, 2004.
Карась Г. Статика і динаміка жанру дитячої опери у творчості композиторів української діаспори ХХ ст. // Вісник Державної академії керівних кадрів культури і мистецтв. – Київ, 2010. – No. 2. – С. 89–93.
Яців Р. Роберт Лісовський (1893–1982): дух лінії. – Львів, 2015. – С. 11, 13, 79–84,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