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즈씨
시마즈씨(일본어: 島津氏)는 무가 겸 화족이었던 일본의 씨족이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츠마를 다스렸으며, 유신 후에는 공작가가 된 사츠마 시마즈씨가 가장 유명하지만, 그 밖에도 다수의 분가가 있다. 이 문서는 주로 사츠마 시마즈씨를 주류로한 문서이다. 돌림자로는 「다다(忠)」나「히사(久)」이다. 또한, 공식 문서에는 「嶋津氏」 라는 표기를 사용해왓다. 개요원래는 가마쿠라 막부에서 임명된 슈고 가문이었으나, 센고쿠 시대에 다이묘로 성장, 에도 시대에는 사쓰마번을 다스리는 도자마 다이묘로 존속했다. 전성기에는 사쓰마국을 중심으로 미나미큐슈 지방을 지배하였고, 초대 당주인 시마즈 다다히사는 사쓰마·오스미·휴가의 슈고직에 에치젠국의 슈고직까지 겸하기도 하였다. 무예를 숭상하는 가풍을 지녔고「시마즈에는 어리석은 군주가 없다.」라는 세간의 평처럼 대대로 뛰어난 당주를 배출해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번영하였다. 또한 에치젠, 시나노, 스루가, 와카사, 오미에서 지파가 나와 각각 에치젠 시마즈, 시나노 시마즈, 스루가 시마즈, 와카사 시마즈, 오미 시마즈로 불리고 있다. 센고쿠 시대에는 종래의 종가에서 서자 계통인 이자쿠가(伊作家)로 당주 자리가 옮겨졌으며 사쓰마 번주의 가문도 이 계통에 해당된다. 역대 당주가문 분열 이전
분리
가독 재통일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학계 논란17대 당주시마즈 요시히로를 17대 당주로 하는 사료의 초출은 에도막부 말기에 편찬된 『시마즈씨 정통계도』로 여겨진다. 이후, 시마즈가의 족보는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요시히로=17대 당주"라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또한,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후, 요시히사에게 오스미를, 요시히로에게 사츠마를 각각 창고입지로 배정한 것도, 요시히로가 당주라는 인식을 보강하는 재료가 되었다 (시마즈 = 사츠마라는 인상에서 사츠마를 부여받았으니 당주일 것이다는 견해가 가능)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마즈가 당주의 증거인 "오시게모노(御重物)"의 연구가 니시모토 세이지에 의해 진행되어[1] 당주의 지위가 요시히사로부터 타다츠네에게 직접 양도된 사실이 판명되자 요시히로는 17대 당주가 아니었다는 학설이 야마구치 켄이치와 후쿠시마 카네하루 등 많은 연구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다.[2] 이후, 요시히로는 "당주였던 설"과 "당주가 아니였던 설"이 병렬하게 되었다. 또한, 시마즈가 관련 물품을 소장・연구・전시하고 있는 쇼코슈세이칸에서는 족보 중시의 관점에서 요시히로를 17대 당주로 인정했지만, 2004년에 쇼코슈세이칸 문화재 과장이자 가고시마 대학 법문학부 시간강사인 마츠오 치토세도 요시히로는 당주가 아니라는 논물을 발표했다.[3] 또한,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당사자인 시마즈 본종가 및 쇼코슈세이칸 자체에선 2016년 현재도 요시히로를 17대 당주로 하고 있다. 또한, 시마즈씨 가독 승계에 관해서는 무로마치 시대 중기에 시마즈 타다쿠니가 한때 동생인 모치히사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가 최종적으로 가독을 되찾았다는 니이나 카츠히토의 설이나 전국시대에 시마즈 카츠히사를 츄방한 삿슈가의 시마즈 사네히사가 중신의 지지를 받아 가독을 일시 승계했다는 아마구치 켄이치의 설도 나와있고, 시마즈 본종가 및 쇼코슈세이칸의 견해와는 다른 변천상이 그려지고 있다. 황족
시마즈씨 씨족
피관의 격 분배시마즈가의 피관은 가문의 격에 따라 세 개로 호칭이 나누어져 있었다. 가장 격이 제일 높은 가문은 고잇카( 그다음으로는 미우치( 이어서, 쿠니슈( 공식 서명으로 보이는 성(姓)공식 문서 서명은 시마즈가 당주가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유자(양자와 비슷하지만 더 앝은 관계)가 되는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는 "코레무네노아손○○(惟宗朝臣○○)", 전국시대부터 닛타 겐지를 칭할때까지는 코노에가의 서류로써 "후지와라노아손(藤原朝臣○○)"이라고 서명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 도쿠가와가의 "마츠다이라(松平)"의 성이 부여된 후, 막부의 공식문서 등에서는 "마츠다이라 사츠마노카미 (변동 있음) (松平薩摩守○○)"라고 기술했다. (에도시대 중기 이후, 내부의 공식 문서 등에서는 "미나모토노아손(源朝臣○○)"이라고 서명했다) 가몬시마즈씨의 정식 가몬에 사용된 도안은 시마즈 쥬몬지 (붓글씨의 쥬몬지), 「마루니쥬노지(丸に十の字)」, 「쿠츠와노쥬지(轡十字)」 등이 있다. 모두 쥬몬지 문양으로, 재갈문이나 쿠루지몬과는 구별된다. 정식 가몬에는 「시마즈 모란」 (코노에가에서 받음), 「고산기리」를 사용한다. 또, 『몽고습래회사』에는 쥬몬지 위에 츠루마루문을 그린, 시마즈 히사츠네의 깃발이 그려져있다. 시나노 시마즈씨 나가누마가의 「쿠츠와노쥬지(轡十字)」에 대해서는 쿠츠와로서 『요네후 카노코』에 실렸다. 쥬몬지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2마리의 용을 나타냈다고 하는 것 (『시마즈 국사(島津国史)』), 오슈 정벌 시에 초대 타다히사에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젓가락으로 십자를 만들어, 이것을 시마즈의 가몬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 (『니시번 야사(西藩野史)』), 가마쿠라 시대에 중국 전통 부적의 영향으로, 재앙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복을 불러오기 위해 성호를 긋는 풍습이 있어, 그것을 가몬으로 했다 (『일본문장학』) 등, 여러 가지 방면에서 시마즈가의 고리십자에 대한 고찰이 되고 있다. 무로마지 중기에 편찬된 『견문제가문(見聞諸家紋)』에는 시마즈 쥬몬지가 게제되어있는데, 에도시대 초기의 『관정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에 게재되어있는 동그라미에 십자(쿠츠와노쥬지) 도안이나, "마루니쥬노지" 도안이 정식 가몬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도 병풍』 (츠가루가 본)에는 시마즈 쥬몬지를 그린 요시히로의 깃발이 그려져 있는데, 토요히사 깃발에는 쿠츠와노쥬지가 그려져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연구가인 오노 노부나가는 세키가하라 전쟁을 벌인 이시기가 붓글자 쥬몬지에서 쿠즈와노쥬지로의 변천시기라고 추측하고 있다. 중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기독교 포교를 위해 일본 첫방문인 가고시마에 갔을 때, 영주 시마즈씨의 가몬이 "하얀 십자가"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마즈씨 연고 사찰・보다이지![]()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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