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치 미쓰히데
아케치 미쓰히데(일본어: 明智 光秀, 에이쇼 13년(1516년)/교로쿠 원년(1528년) ~ 덴쇼 10년 음력 6월 13일(1582년 7월 2일))는 센고쿠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이다. 통칭은 주베에(十兵衛), 아버지는 아케치 미쓰쓰나(明智光綱)라고 알려져 있다. 여생의 반은 알려져 있지 않다.[모호한 표현] 유아명은 모모마루(桃丸). 아호는 쇼안(咲庵). 태어난 년도는 1528년(교로쿠(享禄) 원년) 또는 1526년(다이에이(大永) 6년)의 두가지 설이 있다.[1] 태어난 곳도 기후현 가니시(可児市)에 있는 아케치(明智)의 아케치성, 야마가타시(山県市) 미야마(美山) 등 두 가지 설이 있다. 미노 아케치 성주로서 사이토 도산의 가신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여러 영지를 돌아 다녔으며, 뒤에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활약한다.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노부나가를 자결케 한 인물로 유명해진 무장이다. 생애오다가 가신전청년기의 이력은 불명확한 것이 많지만, 통설에 의하면, 미노국 슈고 도키씨의 일족으로 센고쿠 다이묘 사이토 도산을 섬긴다. 1556년 도산과 그의 아들 요시타쓰 간의 싸움에서는 도산의 편을 들었다. 이 싸움에서 요시타쓰가 아케치 성 공격하고, 이때 아케치 일족은 흩어지게 된다. 어머니쪽의 와카사 다케다가의 도움으로 에치젠국의 아사쿠라가를 섬긴다.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매부인 다케다 요시즈미를 의지해 와카사로 오고, 그 후 에치젠 아사쿠라가로 도망오게 된다. 이때 미쓰히데는 요시아키와 접촉을 갖는다. 미쓰히데의 어머니는 다케다 요시즈미와 남매관계로 알려져 있다. 또,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어머니도 와카사 다케다가 출신으로 있었고, 이런 연후로 요시아키 접대역으로 임명되었다고 생각된다. 요시아키는 아사쿠라의 상경을 기대했지만, 요시카게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쓰히데를 통해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를 공격 자신을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옹립되도록 요청한다. 미쓰히데의 숙모가 사이토 도산의 부인으로, 노부나가의 정실인 사이토 도산의 딸(노히메)과는 사촌관계로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그 인연으로 요시아키의 부탁을 노부나가에게 청했다고 전해진다. 오다가의 가신으로1569년경 기노시타 히데요시 등과 함께 오다가가 지배하는 교토 부근의 정무를 담당한다. 요시아키와 노부나가가 대립하기 시작하자, 요시아키와 결별하고 노부나가의 가신이 된다. 그리고, 수많은 전공을 세워 1572년경에는 오미국 시가 군을 영지로 받아 그곳에 사카모토 성을 축성한다. 1575년에는 고레토라는 성(姓)과 휴가노카미라는 관직을 부여받는다. 성주가 된 미쓰히데는 이시야마 혼간지와 노부나가를 배반한 아라키 무라시게,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공격하는 등 긴키 각지를 전전하고, 단바국 공략을 담당한다. 1579년에 드디어 단바 국을 평정하고, 단바국을 영지로 받아 가메야마 산성, 요코야마 산성(현 후쿠치야마성), 슈잔성을 축성한다. 그의 영지가 교토를 잇는 길목인 도카이도와 산인도에 위치하는 것만 봐도 오다가에 있어서 미쓰히데는 중요한 요직에 있어다고 하겠다. 또, 단바를 배정받은 동시에 단고의 호소카와 후지타카, 야마토의 쓰쓰이 준케이 등의 긴키 지방의 이들 다이묘에 관한 지휘권을 부여받는다. 근년 역사가들은 이 지위를 간토칸레이에 버금가는 '긴키칸레이'이라고도 부른다. 1581년에는 교토에서의 노부나가의 무력시위가 있었고, 이때 모든 직무를 담당했었다. 1582년 하시바 히데요시의 모리 정벌(주고쿠 지방) 지원을 명받아 출진한다. 도중 음력 6월2일(6월21일) 이른 아침 교토로 들어설 즈음 주군 노부나가 토벌의 의지를 천명했다고 한다.[2] 이리하여 미쓰히데는 노부나가가 묵고 있는 교토의 혼노지에 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급습한다. 소수의 병력만으로 지키고 있던 노부나가는 그 곳에서 자결한다. 또 니조 어소에 있던 노부나가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와 교토의 치안을 담당했던 무라이 사다카쓰를 제거한다. 혼노지의 변에서 자신이 모셨던 주군을 죽임으로써 배신자란 이름을 남겼지만, 미쓰히데에게 동정을 품는 사람도 적진 않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후대에서는 미쓰히데에게 초점을 둔 작품이 많이 등장하게 된다. ![]() 교토를 제압한 미쓰히데였지만, 협력을 구한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쓰쓰이 준케이의 대응은 기대 밖이었다. 그리고, 미쓰히데 스스로 신정권 정비를 할 틈도 없이 11일후 주고쿠로부터 돌아온 하시바 히데요시와 겨루게 된다. 하시바 군 24,000(26,000 ~ 40,000)에 비해 아케치군 12,000(16,000 ~ 18,000)은 수적으로는 불리했지만, 아케치 군은 당시 오다 군단 내에서 뛰어난 뎃포(조총)운용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하시바 군으로써도 결코 낙관적이진 않았다. 그러나, 명분상에서 불리한 미쓰히데에게 붙는 노부나가의 가신은 적었다, 그리고, 하시바 군에 병력상으로도 밀려 패전하게 된다. 그 날밤 미쓰히데는 사카모토로 도망가지만, 가는 도중 오구리스(교토시 후시미구)에서 토착 농부의 손에 의해 목베임을 당해 어이 없는 최후를 맞게 된다. 하지만, 미쓰히데의 목은 부패가 심하게 되어, 정말 미쓰히데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미쓰히데가 난코보텐카이(南光坊天海)라는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미쓰히데의 수수께끼그리스도교도 설미쓰히데가 사용했던 인장은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모양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또 딸 다마코와 가신 다카야마 우곤과 측근들이 그리스도교도가 많았다. 아타고햐쿠인의 진상아타고햐쿠인[3]이란, 미쓰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키기 전 교토 아타고 산의 아타고 신사에서 개최된 연가회를 말한다. 이 연가회에서 미쓰히데는 모반에 대한 생각을 나타냈다고 하지만, 의문점이 많다. 또 이 연가회에 참석한 사토무라 조하 등 미쓰히데 이외의 참석자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많았다. 하기에서는 아타고햐쿠인의 이해할 수 없는 점과 아직 명확히 알 수 없는 것에 관해서 기술했다. 미쓰히데는 이 연가회에서 "時は 今 雨が下しる 五月哉(때는 바야흐로/비가 내리는/오월이로다)"라고 첫 구절을 읊었다. 이 구절은 "土岐は今 天が下知る 五月哉(도키가 바야흐로/천하를 아는/오월이로다)"라고 할 수 있고, 미쓰히데는 도키 가문과 혈연이 있으므로 해석하면 "미쓰히데가 천하를 호령한다."라는 의미라는 설이 있다. 혹은 "天が下知る(천하를 안다)"라는 것은 조정이 천하를 다스린다. 라는 존황사상에 토대를 두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미쓰히데의 모반이 황실과 관련된 것임을 시사하는 글로 꼽히기도 한다. 정말 연가에 미쓰히데의 모반의 의지가 있다면, 첫 구절이 아닌, 두 번째 구절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두 번째 구절은 "水上まさる庭のまつ山(물이 차오르는 정원을 기다리는 산)"이다. 우선 水上まさる(물이 차오른다)란, 미쓰히데의 가문은 족보를 더듬어 올라가면 겐지(源氏) 일족 출신이고, 노부나가의 오다 일족은 다이라 가문(헤이케平家, 헤이지平氏) 출신이다. 차오른다는 구절과 삼수변이 겐지의 源과 이어지고, 庭(정원)은 조정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고, まつ山(기다리는 산)란 대망(待望)이라는 대응구가 된다. 따라서 두 번째 구절도 해석하면, "겐지(미쓰히데)가 승리하기를 조정도 바라고 있다."가 된다. 혼노지의 변의 원인미쓰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주인인 노부나가를 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지적되지만, 확실한 모반 이유에 대해서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밑은 현재 주장되고 있는 주요한 가설들이나, 후세의 창작이 많으므로 주의할 것. 원한설주군 노부나가는 성미가 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미쓰히데를 학대하거나 심하게 대했다는 사료들이 여럿 있다. 이를 대표하는 예는 다음과 같다.
야망설미쓰히데 자신이 천하통일을 노렸다는 설. 그러나 이 설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장으로 알려진 미쓰히데가 이와 같은 모반으로 천하를 얻는다고 믿었을 리 없다."라는 의견과 "상대의 100배이상의 병력으로 기습해 노부나가를 죽였는데 이것 이상 좋은 찬스는 없다."라는 의견이 있다. 공포심설노부나가는 그를 오랫동안 모셔왔던 사쿠마 노부모리, 하야시 히데사다 등을 추방했다. 이에 미쓰히데가 만약 성과를 이루지 못한다면, 자신도 머지 않아 추방될 것을 우려해 모반을 했다는 설이다. 혹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정치, 군사정책을 이행하는 노부나가의 개혁에 대해, 고사에 밝았던 미쓰히데는 옛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모반을 했다는 설이 있다. 미쓰히데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오다 노부나가 둘을 맺어 주는 역할로 해서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관계가 깊었던 요시아키로부터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설. 조정 지시설'노부나가가 조정을 뒤엎으려 한다'고 생각한 조정이 미쓰히데에게 명을 내려 모반을 했다는 설. 이 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1582년경 노부나가는 오기마치 천황옹립등 강력하게 조정을 이끈다. 또 최근 발견된 아즈치성 혼마루어전의 구조물로부터 아즈치성 혼마루는 천황의 거처인 다이리세료덴(清涼殿)의 구조를 본떠 만들어졌다. 또, 역사학자 다치바나 교코는 《덴쇼주넨카키(天正十年夏記)》등을 토대로 왕족인 사네히토 친왕와 구게인 고노에 사키히사가 혼노지의 변의 중심인물로 있다라는 내용의 각종 논문으로 지적했다. 이 조정 흑막설의 주요 논거가 되는 덴쇼주넨카키는 사네히토 친왕의 의형제로 있는 가주지 하레토요의 일기 일부에 쓰여 있다. 사료로써도 실뢰성이 높다 하겠다. 다치바나 교코의 견해에 따르면, 오기마치 천황이 노부나가와 상호의존관계를 구축한 일로 인해 궁핍한 재정 상태를 회복했다는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노부나가와 조정의 관계가 양호하다고 할 수 없다. 정무 요직인 산쇼쿠(三職) 취임 문제 등을 고려하면, 조정이 노부나가의 일련의 행동에 위기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단, 이 덴쇼주넨카키에서 고노에 사키히사가 미쓰히데의 모반에 관여했다는 것은 'ひきよ 히키요[*]'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일본어: 非拠 히쿄[*](재능이 없고 지위가 높음)라고 해석한다면, 고노에 사키히사 관여설이 소멸된다는 지적이 있다.[5] 시코쿠설비교적 새로운 설. 오다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시코쿠의 조소카베 가문을 굴복시키라는 명을 한다. 그리하여 미쓰히데의 중신인 사이토 도시미쓰의 여동생을 조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시집보내 혼인관계를 맺도록 했지만, 1580년에 노부나가는 무력으로 시코쿠를 평정하기로 방침을 변경했기 때문에 미쓰히데는 체면을 구기게 됐다. 오사카에 시코쿠 토벌군이 집결하기 직전을 계산해 미쓰히데(정확히는 도시미쓰)가 혼노지를 습격했다는 설이다. 여러 무장의 흑막설오다가를 둘러싼 여러 장수들의 흑막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로 거론된다. 이에야스의 경우.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장남 노부야스와 부인 쓰키야마도노를 죽인 원한이 있다. 후에 이에야스가 미쓰히데의 친척인 사이토 도시미쓰의 딸 후쿠(가스가노 쓰보네(春日局))를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유모로 천거한다. (실제 후쿠를 천거한 것은 교토 치안을 담당한 이타쿠라 가쓰시게이다.) 히데요시의 경우는 사쿠마 노부모리, 하야시 히데사다 등이 추방되어, 불안에 떨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혼노지의 변이 있을 때, 모리와 전쟁 중(빗추 다카마쓰 성 공격)이었다. 하지만, 바로 모리와 강화를 맺고, 군사를 교토로 되돌린다.(주고쿠오가에시) 그것도 11일만에 대군을 이끌고 온다는데서 사전에 알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견이 있으며,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이 히데요시이기 때문에 최대 수혜자를 의심하는 음모론을 제기하는 연구자가 많다. 다른 소수 의견으로는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오다 노부타다가 흑막이라는 설도 있다. 보충 설명
예수회 음모설다치바나 교코(立花京子)가 《노부나가와 십자가》라는 책에서 제창한 설로 조선과 명 등 아시아의 침략을 노리던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가 일본의 정권 교체를 꾀하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이다. 이설은 "오다 노부나가 정부가 예수회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고 되어 있다. 예수회는 노부나가의 후원자 였는데 노부나가가 예수회와 스페인, 포르투갈 식민 확장 정책 의도에서 일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또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자 예수회는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날 것을 우려해 기리시탄이었던 아케치 미쓰히데를 앞세워 노부나가를 죽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뢰도가 떨어지는 ' 아케치 軍記' 등을 검증 없이 다수 인용 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 이 설은 다른 학자들의 비판을 받고 있다. 미쓰히데는 오구리스에서 죽지 않고 승려가 되어 피신에 성공하고 후일 신분을 바꾸어 난코보 덴카이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난코보 덴카이는 에도 시대 초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언자로서 활약한 승려로, 그의 경력에는 불명확한 점이 많다. 이설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도라지 문양의 길경문은 가토 기요마사 등 많은 무장이 사용했었고, 미쓰히데만의 문장이라고 할 수 없다. 덴카이가 일시 승병으로써 갑옷을 입었다 해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또 덴카이가 아케치 미쓰히데라면, 116세에 죽었다는 것이 되고, 당시 평균 수명으로 본다면 상당히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나, 실제로 덴카이가 108세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의견이 분분하다. 후일 실시된 필적감정에서는 다른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더욱이, 승려와 미쓰히데의 관계로 말한다면, 미쓰히데의 아들로 알려진 난코쿠 본케가 건립한 가이운지[10]에는 미쓰히데 유일의 초상화가 남아있지만, 이 절에 있는 미쓰히데 위패의 안에는 "当時開基慶長四巳亥"라고 새겨져 있다. 이 문구의 위패의 관계는 현시점에서는 불명확하다.[11] 일화
계보시조는 헤이안 시대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미쓰(源賴光)로 해서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미노도키씨 일파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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