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태실석난간조배의궤
영조대왕태실석난간조배의궤(英祖大王胎室石欄干造排儀軌)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조선 영조의 태실(胎室)을 가봉(加封)하는데 따른 경위와 과정 또는 의식절차 등 모든 관련사실을 적은 필사본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있다. 1990년 12월 14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7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6년 5월 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901-11호 '조선왕조의궤 (朝鮮王朝儀軌)'로 승격되었다.[1] 개요영조대왕태실석난간조배의궤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조선 영조의 태실(胎室)을 가봉(加封)하는데 따른 경위와 과정 또는 의식절차 등 모든 관련사실을 적은 필사본이다.[2]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의 무병장수를 위해 태(胎)를 석실(石室)에 안태(安胎)했고, 왕으로 등극하면 태실에 위용을 갖추기 위해 일정한 의식과 절차에 따라 태실을 만들고 주위에 상석(裳石)을 깔고 호석난간(護石欄干)을 둘러 조성했다.[2] 영조의 태는 숙종 20년(1694) 9월 26일에 관상감(觀象監)에서 올린 글에 따라 1등태봉(一等胎峰)인 무성리 태봉산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선정돼 다음해 9월 28일 진시(辰時)에 태를 안장했다.[2] 이후 즉위 직후 석조물로 고쳐 다시 조성해야 했지만 영조 태실은 청주 일원에서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과 거듭된 가뭄으로 늦춰지다가 영조 5년(1729) 태봉(胎封)을 석조물로 다시 치장했다.[2] 이 의궤에는 이밖에도 일자별로 자세한 조성경위를 적고 있고 관계한 사람과 지방별로 동원된 역군(役軍) 장인(匠人) 승군(僧軍)의 인원수와 수요물자의 내역 또는 태실의 각종 석조물과 태실비의 형태 및 크기 등 세부내용까지를 상세하게 기록해 우리나라 태실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2] 같이 보기
각주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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