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병 박해![]() 용기병의 박해(Dragonnades : 1681~1686)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인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용기병들을 동원하여 개신교인들을 박해한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개요루이 14세는 개신교인들을 말살하려고 했고, 그들로 하여금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강제로 개종하도록 강요했다. 1675년 프랑스 정부는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들에게 연금 등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개종금고(La Caisse des Ěconomats)'를 설립하였다. 경제적 회유를 통해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촉진시키려는 것이었으나 이 역시 개신교인들의 발길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 경제적 회유는 이내 가혹한 탄압으로 바뀌었고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기 위해 정부가 시행하던 용기병을 가톨릭 개종 작업에 투입했다. 용기병들은 개신교인들의 집에 보내 강제적으로 주둔하며 갖은 민폐를 끼쳤다.[2] 이들은 개신교인들의 집에서 집주인을 살인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며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압박했다. 또 임종시에 로마 가톨릭사제가 기름을 바르며 병이 낫기를 기원하는 성사인 종부성사를 거부한 개신교 신자들의 묘지에서 시체를 꺼내어 사립짝에 올려놓고, 말이 끌도록 할 것을 명령했다. 또 용기병들은 개신교인들의 목을 잘라 창끝에 메달고 다니는 등 개신교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끔찍한 학살당시 도시의 거리와 입구에서 벌어진 상황을 폴 아자르(Paul Hazard)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위그노 즉, 불란서 개신교 신자들의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책에는 용기병들의 피에 굶주린 행위를 새뮤얼 스마일스(Samuel Smiles)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 강제 개종에 따라 베아르 지역에서는 2만2000여명의 개종자가 나왔고 몽또방에서 9600여명이 나오는 등 많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폭력을 사용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용기병의 박해는 1685년에는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개종자들은 형식적인 개종을 했을 뿐 그들은 자신들의 본래의 양심과 신앙을 버리지 않고 광야교회(les Eglises du Desert)에 모여 비밀리에 예배하였다. 이처럼 개종을 위장한 채 프랑스 국내에 남아있던 개신교인들은 루이 14세에게 가시 같은 존재였다.[5] 개신교인들의 탈출루이 14세의 개신교 탄압은 용기병의 박해를 거쳐 개신교 차별금지법인 낭트칙령을 무효화한 퐁텐블로 칙령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결국 이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의 개신교인들은 프랑스를 떠나 이웃 네덜란드나 영국, 스위스, 독일, 스칸디나비아, 러시아, 남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등으로 탈출하여 프랑스 국력의 침체로 이어진다. 워렌 스코빌(Warren C. Scoville)의 연구에 따르면 1700년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2000만명으로 그 중 개신교인이 150~200만명을 차지했는데 박해를 피해 탈출한 개신교인들은 대략 10%인 20만명에 달한다. 이중 네덜란드가 5~6만명의 개신교인을 받아들여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고 잉글랜드가 4~5만명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그 다음으로 독일(2만5000~30000명), 스위스(2만2000) 아일랜드(10000명)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 망명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이 다수를 차지하는 아일랜드나 루터교의 스칸디나비아,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 등에도 스며들면서 근대 유럽의 종교적 다양성을 만들어 내는데에도 기여하였다. 강제 개종에 대한 지탄용기병의 박해는 인간의 양심을 폭력으로 억누르려는 무력탄압으로 지탄 받았다. 한때 가톨릭 교도였으며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를 한바 있는 삐에르 벨르(Pierre Bayle)는 《루이 대왕 치하의 완전한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 대하여(Ce que c'est la France toute catholique sous le rėgne de Louis Le Grand)》라는 책자에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같이 보기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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