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 말의 독립운동가 겸 개화파 정치인 윤치호(尹致昊)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포 백씨 백매려이다. 제4대 대통령윤보선과는 재종간이다. 제3대 농림부장관을 지낸 교육자 윤영선(尹永善)의 이복 동생이며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을 지낸 윤장선의 동생이었다. 본관은 해평이다.
생애
생애 초반
윤치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그는 안양자, 유수만 등을 찾아가 음악의 기초를 사사하였다. 그 뒤 경성중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경성고보 재학 중 조선일보사 주최 제1회 콩쿠르에 출전하여 우승하고 이후 1~4회 연속으로 피아노 부문 1위를 차지했으며, 전국남녀중등학교 현상 음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다. 경성고등학교 4학년 때 일본으로 유학, 동경 예술 대학(우에노 음악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1944년 귀국 직후 부민관에서 김순남 등과 함께 귀국독주회를 열고 데뷔하였으며, 이때 그는 여동생 윤보희와 함께 듀엣으로 피아노 연주를 하기도 했다. 해방직후에 김순남, 이건우, 남궁요설, 문학준, 이인형 등과 함께 음악인단체인 '음악가의 집'에 가입, 순수 실내악 음악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의 기악부장, 조선음악가동맹에도 가입했다. 조선음악가동맹에서는 정희석·조념·이강렬과 함께 현악4중주단으로 활동했다.
194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서 재직하다가 그해 5월미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6월 하와이 연주에 갔다가 바로 미국줄리어드 음악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눌러앉게 된다. 1949년12월에는 뉴욕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하기도 했다.
미국줄리어드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한동안 미국에서 살았다. 그 뒤 잠시 귀국하여 서울예술고등학교의 교수, 연세대학교 음대 교수,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 등으로 재직했으나 1980년대에 다시 도미, 미국캘리포니아주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솔로 곡과 협주곡을 많이 소개 연주했으며 '서울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활동을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말년
2005년10월 25일 제3회 한인하 피아노상을 수상하였다.[1] 그는 85세의 고령으로 제3회 한인하 피아노상 수상자로 선정돼 문화계에 화제가 되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