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화자유주조
작물의 가격이 똥값으로 떨어져 고통받던 농민들은 물가상승을 원했지만, 동북부의 철도회사, 공장주, 자본가, 사업가들은 디플레이션으로 이득을 보았기에 은화자유주조 및 그에 따른 예측불가한 경제팽창에 반대하고 안정적인 금본위제를 지지했다. 이런 이유로 은화자유주조는 중서부 밀 농업지대와 남부 목화 농업지대의 농민들에게 예상 외의 큰 호응을 얻었다. 반면 중동부 옥수수 농업지대의 농민들은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은화자유주조는 1896년과 1900년 대선의 민주당 내부 경선에서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고, 그 지도자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었다. 1896년 선거에서는 인민당이 브라이언과 은화자유주조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은화자유주조 지지자들은 주요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고, 1896년 이후 미국 경제는 금본위제로 굳어졌다.[2] 은화자유주조는 은화를 통화에서 제외한 1873년 통화법에서 비롯되었으며, 통화법 반대자들은 이것을 "1873년의 범죄(Crime of '73)"라고 불렀다. 1896년 이후 금본위제가 굳어졌음에도 은화자유주조운동은 연방준비제도가 완전히 확립된 1913년까지 지속되었다. 같이 보기각주외부 링크 |
Portal di Ensiklopedia Du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