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나츠 쾨글러(Ignaz Kögler, 1680년 5월 11일 – 1746년 3월 30일)는 청나라에서 활동한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이다.
생애
이그나츠 쾨글러는 천문학자이자 만다린이었다
쾨글러는 바이에른주의 란츠베르크암레흐에서 태어났다. 그는 요한 아담 샬 폰 벨과 함께 1650년에서 1750년 사이에 중국 선교 활동을 한 50명의 독일 예수회원들 중 선도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696년 10월 4일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1712년부터 1714년까지 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수학과 히브리어를 가르쳤다.[1]
그는 1715년에 프라하를 떠나 포르투갈로 향했으며, 저명한 체코의 중국학자카렐 슬라비체크와 합류했다.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예수회원 한 명이 그들과 함께했다. 1716년 3월 13일, 그들은 중국으로 출발했다. 그들은 170일이 걸려 도착했으며, 큰 폭풍을 견뎌냈는데 이 폭풍으로 많은 소지품이 손상되었다.[2]
그는 폭넓은 학식 덕분에 황실에서 존경을 받았으며, 30년 동안 천문 수학 재판소장을 역임했다. 그는 2급 만다린이었고, 1731년부터는 최고 형평법원(Li-pu)의 일원이었는데, 이는 외국인이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직위였다.[3] 그는 이 직위들을 수락하면서도 이에 따른 봉급을 거절했다.
그의 협력자이자 후계자인 페르디난트 아우구스틴 할렌슈타인은 그를 "이 나라에 온 사람들 중 가장 교양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불렀다.[4] 쾨글러는 오이세비우스 아모르트와 동양학자 T. S. 바이엘과 같은 여러 유럽 학자들과 활발한 과학적 서신 교환을 가졌으며, 바이엘에게 그의 "무제움 시니쿰(Museum Sinicum)"을 위한 많은 기여를 보냈다.[5]
그는 두 차례 선교단의 방문자이자 중국 및 일본 관구의 관구장이었으며, 옹정제 시기에 시작된 박해 동안에는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통해 선교단의 주요 지지자였다. 그는 65세의 나이로 베이징시에서 사망했다. 그는 예수회 자란 묘지에 묻혔다.
각주
↑cf. Mederer, "Annal. acad. Ingolstadt.", III, 130 sq. ; Romstöck, "Die Jesuitennullen Prantl's" (Eichstätt, 1898), 178-84
Manuscript Letters in the Vienna State Archives, Geistl. Angelegenheiten No. 419 IV;
Correspondence with Amort and numerous other letters, part in Munich State Library, MSS lat., t. I, p. 1 no. 1396-1407; part in Reichs-Archiv, Jesuitica in genere, NN. 278-81.
Printed letters in Welt-Bott, nn. 157, 162, 190, 196, 198, 202, 228, 575, 578, 669;
LIPOWSKY, Geschichte der Jesuiten in Bayern (Munich, 1816), App. nn. 3 and 4;
VON LAIMBECKHOVEN, Reise-Beschreibung (Vienna, 1740), 47.
The catalogue of Kögler's astronomical, mathematical, and historical writings is given in 솜메르보겔, Bibl. des écrivains de 1a c. de J. For biographical information consult:
PLATZWEG, Lebensbilder der deutschen Jesuiten (Paderborn, 1882), 272;
VON RICHTHOFEN, China, I (Berlin, 1877), 688;
Welt-Bott passim;
안톤 훈더([[:de:{{{3}}}|독일어판]]), Deutsche Jesuitenmission re des 17. u. 18. Jahrh. (Freiburg im Br., 1899),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