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공과대학
이란공과대학(페르시아어: دارالبنون dɒːɾolfʊˈnuːn, 원어로 '공과대학'을 의미함)[2]은 1851년에 설립된 이란 역사상 최초의 국립대학이다. 카자르 왕조 시대인 1851년 아미르 카비르 재상에 의해 설립되었다. 원어의 발음을 살려 '다르 올-포눈' 또는 '다르 울-푸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개요나시르 앗딘 샤 시기의 재상인 아미르 카비르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의학, 공학, 군사학, 지질학 전공을 개설하였다. 이 대학의 설립 취지는 미국의 텍사스 A&M 대학교와 퍼듀 대학교, 프랑스의 에콜 폴리테크니크와 유사했다. 이 대학이 개교한 직후에는 궁정에서 동시통역사로 근무한 아르메니아 출신 미르자 다우드 칸의 노력으로 오스트리아 제국(現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부터 교수진을 영입할 수 있었다[3]. 교수진 중 1명인 야콥 에두아르트 폴라크는 오스트리아 의사 면허증을 갖고 있었으며, 이란으로 입국한 뒤에는 나시르 앗딘 샤의 주치의를 역임했다. 1851년 개교 당시에는 135명의 입학생을 받았고, 제1회 졸업생 중 45명이 1858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유럽으로 유학을 갔다. 그 중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 중 5명이 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이란공대 의학부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후 교수진은 16명의 유럽인과 26명의 이란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유럽인 교수진의 경우 프랑스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다[4]. 1889년 이란 주재 영국 대사인 커즌 경에 따르면 39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었고, 그 중에서 75명은 군사학, 140명은 자연과학과 공학을 전공하였다고 한다. 또, 그 중에서 80명은 건축공학,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있었다고 한다[5]. 이 대학은 1891년까지 누적 1,100명의 학생에게 학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참고로, 이 대학은 이란의 역사상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학사 학위 권한을 부여받은 곳이기도 하다. 이 대학의 출판부에서 선진 과학 서적이 발간되었고, 이란 역사상 최초의 사진 스튜디오도 개장했다. 참고로, 당시 이란에서는 나시르 앗딘 샤 본인부터 사진 촬영을 워낙 좋아하였으며, 궁정의 관리와 테헤란 시민들에게도 사진 촬영 기술을 익힐 것을 권유했다. 이 대학의 교수로 재직한 프랑스 출신 장 밥티스트 르메르(Alfred Jean Baptiste Lemaire)는 이란 역사상 최초의 국가(國歌)를 작곡하였으며, 이 곡은 1873년 나시르 앗딘 샤에 의해 국가로 제정되었다. 이 대학 출신들은 1906년 이란 입헌 혁명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마즐리스(대한민국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한다.)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도 나왔다. 이 대학 출신들의 노력으로 이란 역사상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었고, 이란은 전제군주제를 버리고 입헌군주제로 전환되었다. 참고로 당시 동양에서 가장 먼저 헌법을 도입한 나라는 일본(1889년)이며, 이란이 두 번째이고 세 번째는 청나라(1908년), 네 번째가 태국(1932년)이다. 1919년에는 이 대학의 의학부가 이란공과대학 의과대학(Madreseh-ye Tebb)으로 독립했다[6]. 이 대학에 개설된 모든 전공은 1934년 팔라비 왕조 시기에 오늘날의 테헤란 대학교로 통합되었으며, 이 대학이 소유하던 건물은 고등학교로 개조되었다. 1919년에 독립한 이란공대 의대 역시 테헤란 대학교에 통합되었다. 고등학교로 개조된 이 건물은 새로 개교한 다르 올-포눈 고등학교에서 소유하다가 이 고등학교가 1980년 오늘날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가 세워진 직후 사범대학 건물로 사용되다가 1996년 폐교되었다[7]. 이 대학의 건물은 현재 문화재로 남아 있다. 역대 학장
인용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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