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비차 슈랴크
이반 "이비차" 슈랴크(크로아티아어: Ivan "Ivica" Šurjak, 1953년 3월 23일, 스플리트-달마티아 주 스플리트 ~)는 크로아티아의 전직 축구 미드필더이다. 그는 하이두크 스플리트 전성기의 주역이었는데, 1970년대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를 주름잡았다. 클럽 경력그는 좌측 수비수를 처음에 맡았지만, 모든 선수가 공수전환이 수시로 되면서 모든 보직을 맡을 수 있어야 하는 상황에 최적화할 수 있는 토탈 풋볼 체계에 맡게 보직을 변경했다. 그는 하이두크 스플리트를 떠나고 파리 생-제르맹과 우디네세에서 활동을 이어나갔지만,[1] 뉴욕 코스모스와 레알 마드리드의 제의를 거절했다. 이후, 그는 스페인의 사라고사에서 은퇴했다. 국가대표팀 경력슈랴크는 1973년 10월에 스페인과의 1974년 월드컵 예선전 경기에서 61분에 페타르 크리보쿠차와 교체되어 첫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다. 이후 9년 동안, 슈랴크는 총 54번의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해 10골을 기록했다.[2]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는 온두라스와의 1982년 월드컵 조별 리그 경기였다.[3] 은퇴 후은퇴 후, 그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프르바 HNL의 하이두크 스플리트 단장을 역임했다. 사생활고속정 사건1999년 7월, 하이두크 스플리트 단장직을 역임하던 슈랴크는 자신의 7미터 짜리 1989년제 F-242 고속 소형정 스피드보트를 몰다가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 해안에서 수영하던 한 사람을 살해했다.[4] 희생자는 당시 29세였던 오크루그 거주민인 미로슬라브 디다크로, 1999년 7월 21일 저녁 5시에 치오보섬 해안에서 400미터 떨어진 부시니치 후미에서 슈랴크의 배 프로펠러에 치명적인 두부상을 입었다. 슈랴크는 수영자를 확인하고 우회하려 했지만 실패했다.[4] 고속정 위의 슈랴크 외 그의 배우자를 포함한 4명은 혼수상태에 중상을 입은 디다크를 물 밖으로 꺼내고 해안으로 이동해 스플리트행 구급차로 후송했다.[4] "슬로보드나 달마시야" 보도 내용에 따르면, 슈랴크는 선박의 해상보험에 들지 않았다고 되어 있었다.[4] "베체르니 리스트"는 슈랴크도 선박 조종 면허증이 없었고, 당시 혈중 알코올 농도가 0.4‰에 달했다고 덧붙였다.[5][6] 디다크는 며칠 후 피룰레 병원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로부터 깨어나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다.[4] 슈랴크는 본의 아닌 고살죄로 기소되었다. 몇 년 후인 2008년 3월에 트로기르 지방법원에서 미로슬라브 디다크의 살해 건에 슈랴크의 무죄를 선고했다.[7][8] 지방법원은 판결 근거로 해안에서 400미터 떨어진 곳까지 수영한 디다크는 해안 100미터 이상 수영할 수 없는 법을 위반했고, 또한 "슈랴크가 눈 앞의 파도가 1.5m 높이 일어나고 햇빝이 비치는 바람에 방향을 돌릴 수 없었다"는 점을 덧붙였다.[7] 이후 항소로 인해, 이 건은 스플리트 주법원으로 이첩되었다. 2009년 7월, 형사소송법에 따른 공소시효가 만료되기 전, 지방법원은 기각은 선고했다: 슈랴크 건의 지방 법원 판결에 따라 무죄로 최종판결했다.[9] 수상 및 업적
각주
외부 링크 |
Portal di Ensiklopedia Du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