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선조 21년) 10월 29일, 선조(宣祖)와 정빈 민씨(靜嬪 閔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조에게는 일곱번째 아들이다. 이름은 공(珙)이며 호는 백인(百忍)이다.[1]
5살 때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바람에 의주로 피난을 갔다가, 1597년(선조 30년) 성천으로 옮겨졌다. 이 해 음력 12월 한양으로 돌아와 정식으로 인성군(仁城君)에 봉해졌다.
1603년(선조 36년) 3월 9일, 형조판서를 지낸 윤승길의 딸과 혼인하였다. 《선조실록》에 실린 인성군의 혼례와 관련하여 당시 전쟁을 겪은 직후에 이뤄진 혼례임에도 쓰이는 재물은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많고, 가례를 담당한 관원들이 사적으로 재물을 챙기면서 백성들에게까지 재물을 갈취하는 바람에 그 아우성이 듣지 못할 정도로 참혹했다고 맹비난을 하고 있다.[2]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과 호성원종공신을 책록할 때 인성군은 이복 형 순화군, 이복 동생 의창군과 함께 호성원종공신 1등의 한 사람으로 책록되었다.
광해군 시대
이복 형인 광해군 즉위 후에는 사옹원과 종부시의 도제조를 맡았다[1]. 그러나 1612년(광해군 4년) 길에서 조정의 대간을 보고도 아무런 예의를 갖추지 않은 채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가 탄핵을 받고[3], 1615년(광해군 7년) 음력 윤8월 2일에는 역모에까지 몰렸으나 모두 광해군의 비호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4].
인성군은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와 그 아들 영창대군의 폐위 및 사사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두 사람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에는 먼저 영창대군의 사사를 적극적으로 간하면서[5], 영창대군의 죄를 논하는 데에 참석하지 않은 종친들을 파직시킬 것을 간하였다[6]. 또 1617년(광해군 9년)부터는 종실들을 이끌고 인목왕후의 폐출을 앞장서서 간하기 시작하였다[7][8].
인조 시대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지난 날 인목왕후의 폐위 등에 동조했다 하여 그 처벌이 논의됐으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아 무사할 수 있었다[9]. 또 인조는 인성군을 항상 숙부라고 부르며 예우를 하였다고 한다[1]. 그러나 이 해에 출근하던 사헌부의 관리들이 길에서 자신을 보고도 피하지 않자 이를 문제삼고 감찰을 추고하도록 청하였는데, 이것이 헌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함부로 꾸짖고 욕보이는 바람에 또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인조의 비호 아래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10].
그러나 이듬해인 1624년(인조 2년) 음력 11월에 폐위된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올리고 인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고변되었다[11]. 이로 인해 당시 수많은 대신들이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였으나, 인조는 인성군이 역모를 주도한 무리에 가담한 흔적이 없어 벌을 줄 수 없다 하여 계속해서 처벌을 미뤘다[12]. 그러나 인성군의 유배를 주청하는 상소는 이듬해 음력 2월까지 수도 없이 계속되었고, 결국 이를 이기지 못한 인조는 1625년(인조 3년) 음력 2월 23일 인성군에게 유배령을 내렸다. 다만 유배지에서도 그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물자도 부족하지 않게 공급하도록 명하였다[13]. 이틀 후인 음력 2월 25일 인성군은 강원도간성군에 안치되었는데, 이날 인조는 인성군의 아들 해평도정에게 직접 인성군이 유배를 가게 된 사정을 말해줬을 뿐 아니라[14], 다음날에는 인성군에게 교자와 어의, 호위병 등을 붙여주었다[15].
한편 이 해 음력 10월 18일 검열[주 1]목성선, 승문원 부정자[주 2]유석 등이 인성군에게는 죄가 없으니 방면하라는 상소를 올렸다[16]. 게다가 전날에는 인성군의 유배지에 다녀온 아들 해평도정이 인성군이 병으로 고통스러워 함을 설명하자, 인조는 인성군에 대해 석방을 명하였다[17]. 그러나 곧바로 대간에서 목성선의 상소가 잘못된 것이라고 연이어 반박을 하는 바람에[18], 인성군은 석방되지 못하고 원주로 이배되었다[19]. 이후 인조는 인성군에게 지속적으로 의원과 약, 옷감 등을 보내주었고[20][21], 1626년(인조 4년) 음력 11월 1일 인성군의 생모 정빈 민씨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마침내 인성군을 석방토록 하였다[22].
그러나 이듬해인 1628년(인조 6년) 음력 1월 3일, 당시 세마[주 3] 허유(許逌) 등을 비롯한 이들이 일으킨 역모에 인성군도 참여했다는 고변이 또 들어왔다[23]. 이때는 인목대비까지 나서서 인성군의 처벌을 주청하였고[24], 종실들도 매일같이 인조를 찾아와 인성군의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25]. 결국 인성군은 음력 1월 21일 전라도진도에 안치되었고, 다만 그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하였다[26]. 이후 대신들은 계속해서 인성군의 사사를 청하기 시작했고[27], 결국 인조는 음력 5월 14일 인성군에게 자진할 것을 명하였다[28]. 인성군은 6일 후인 음력 5월 20일 향년 4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1].
사후
인성군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인조는 그 장례를 예장하도록 하였으나, 이 역시 대신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예장(禮葬)[주 4]"을 "후장(厚葬)[주 5]"이라고 이름을 바꾸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다[29].
한편 계속해서 유배지에 남아있던 인성군의 가족들은 1628년(인조 6년) 음력 5월 29일 제주도로 이배되었다[30]. 이후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에 한해 1629년(인조 7년) 먼저 방면되었고[31], 1633년(인조 11년)에는 인성군의 장성한 아들들도 모두 방면되었다[32]. 이어 1637년(인조 15년) 음력 3월 23일 인성군의 관작도 모두 회복되었다[33]. 시호는 효민(孝愍)이다[34].
인성군이 궁을 나가 살던 지역을 "인성붓재"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것을 한자로 바꿔 "인성현(仁城峴)"으로 부르다가, 이것을 줄여 "인현(仁峴)"이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현재 서울특별시중구인현동의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36].
인성군의 막내아들인 해양군은 제주도로 이배되었을 당시 자신이 제주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문집 《규창집(葵窓集)》에 기록하였다. 이는 현재 당시의 제주도의 모습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37].
가족 관계
인성군은 해평 윤씨윤승길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5남 2녀를 낳았다[38]. 장남은 해평군 이길이며, 차남은 해안군 이억이다. 해평군과 해안군은 모두 선조와 순빈 김씨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로 들어갔다. 3남은 해원군 이건, 4남은 해령군 이급, 5남은 해양군 이희이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