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시(일본어: チャシ, 砦)는 아이누의 구릉지 방어 시설을 일컫는 일본어 용어이다. 이 단어는 아이누어의 자시(아이누어: チャシ /t͡ɕasi/)에서 유래했으며, 목책이나 목책으로 둘러싸인 구역을 의미한다. 다른 이론으로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 긴 돌담을 뜻하는 중세 한국어 '잣'(/t͡ɕa̠t̚/)과의 연관성을 제기하기도 한다.[1][2] 홋카이도에서는 520개 이상의 자시가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섬의 동부 지역에 분포해 있다. 다른 자시들은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에서도 발견되었다. 캄차카의 오스트로구나 동북아시아의 고로디셰와 같은 유사한 현상들은 독자적으로 발전했을 수 있다.[3][4] 현재 구시로 지역의 도야 자시를 포함한 일부는 무로마치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17세기 초에 건설되었다.[1] 이러한 자시의 건설은 일본과의 "교역 강화"로 인한 자원 경쟁의 증가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1]
형태
1643년 네덜란드의 탐험가 마르턴 헤리츠 브리스는 홋카이도 동부에서 마주친 자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3]
이 요새들은 다음과 같이 만들어졌다. 요새가 위치한 산에는 가파른 좁은 길이 있었고, 사방으로 사람 키의 1.5배 높이의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두세 채의 집이 있었다. 목책에는 튼튼한 쇠고리가 달린 큰 전나무 문이 있었다. 문을 닫으면 두 개의 튼튼한 빗장이 쇠고리를 통과해 고정되었다. 이 목책의 두 모서리에는 전나무 판자로 만든 높은 망대가 감시용으로 세워져 있었다.
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츠마에 번에 아이누족과의 독점 교역권을 부여했다. 농업 기반이 부족했던 이 번은 교역에 의존했고, 아이누족 역시 점차 일본의 상품과 위세품에 의존하게 되었다.[1][5] 발굴된 자시에서는 일본의 칠기, 도자기, 철기, 도검류와 함께 사할린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구슬이 발견되었다. 소비재로는 쌀, 사케, 담배 등이 있었다.[1] 아이누족은 이에 대한 대가로 조류, 짐승, 물고기에서 얻은 제품과 식물, 약재, 그리고 사할린을 통해 수입한 물품들을 교역했다.[1] 그러나 "교역소의 시장 문화는 과도한 사냥과 어로를 통해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했다."[1] 다음 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자연 자원의 고갈로 기근이 발생했다.[1] 더욱이 "동물과 어장을 둘러싼 경쟁이 대부분의 아이누 분쟁의 핵심이었다."[1]
샤쿠샤인의 난
《에조 호키》(蝦夷蜂起, 에조 봉기)와 《쓰가루 잇토시》(津軽一統志, 쓰가루 통일기)는 1668~69년의 내부 갈등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인 학살과 군사 개입, 그리고 진압으로 이어진 샤쿠샤인의 난으로 알려져 있다.[1] 《에조 호키》에 따르면, 아이누 사회에서의 지역적 영향력은 "좋은 땅", "많은 도구", 카리스마적 권위, 체력을 바탕으로 했다.[1] 1668년, 사슴과 곰 새끼, 살아있는 학을 둘러싼 분쟁으로 하에 지역의 지도자 치쿠나시와 그의 어머니가 시부차리 자시를 불태우고 도망자들을 살해했다.[1] 이에 대응하여 샤쿠샤인은 우라카와 아이누를 보내 아쓰베쓰 자시를 공격하게 했다. 머스켓 총격에 밀려났던 그들은 더 큰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 자시를 점령했는데, 이는 많은 수비대가 식량을 구하러 나간 후였다.[1] 이듬해 분쟁은 일본인들과의 전투로 확대되었다. 평화 회담이 주선되었으나, 일본인들이 회담 도중 샤쿠샤인의 술에 독을 타 그를 살해했다. 시부차리 자시는 다시 한 번 불에 타 무너졌다.[1]
알려진 자시
가쓰라가오카 자시(사적)
고고학자들이 확인한 약 530개의 자시 중 8곳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오타푼베 자시,[6] 시베차리강 자시와 아페쓰 자시,[7] 모시리야 자시,[8] 유쿠에피라 자시,[9] 가쓰라가오카 자시,[10] 네무로 반도 자시,[11] 쓰루가타이차란케 자시이다.[12] 그 외에도 아라시야마 자시, 하루토루 자시, 오니비시의 자시, 사루시나 자시, 사시루이 자시, 세타나이 자시, 우라이케 자시 등이 알려져 있다.[1]시레토코반도에는 19개의 자시가 있지만, 이 지역은 자연유산으로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복합유산으로는 등재되지 않았다.[13][14]
기능
자시는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아이누족으로부터의 방어 기능 외에도 집회와 의례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1][15] 또한 "족장 권력의 가시적 상징"으로도 기능했다.[1] 구전 설화인 우에페케르에 따르면, 앗케시와 네무로의 아이누들은 "좋은 보물"을 노리고 우라이케 자시를 공격했으며, 다른 자시들은 사슴고기와 말린 연어를 찾아 헤매던 굶주린 아이누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