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는 영양을 공격하였으나 방비가 굳건해 무너뜨리지 못했는데, 정침의 설득을 받은 재(宰)가 항복한 덕에 입성할 수 있었고, 유수는 이를 기뻐하여 정침을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종군케 하였다. 정침은 병사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고, 각지에 격문을 뿌리는 한편 둔영을 공략하여, 하남·진류·영천 등 21개 현을 정벌하였다.[1][a]
한편 이 과정에서, 부성(父城)을 지키던 같은 군 사람 영천군연(郡掾) 풍이가 유수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혔다.[6][7][8][9] 정침은 자신과 함께 유수를 따르던 풍이의 종형 풍효(馮孝)·같은 군 사람 여안(呂晏)과 함께 풍이를 유수에게 추천하였다.[6] 이후 풍이는 유수의 진영에 투항하였고,[6][7][8][9] 이때부터 유수에게 중용되어 활약하게 되었다.[6][8]
건무 원년(25년),[1] 유수가 후한을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하였고(광무제),[10][4][11] 이때 정침은 하남태수에 임명되었다.[1][2][3] 이 즈음에 광무제는 공신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봉토를 하사하였는데, 모두가 풍요로운 땅을 골랐으나 정침은 고향 땅을 달라고 하였다. 누군가가 정침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b] 정침은 이렇게 대답하였다.[1][1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