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표도로브나는 뷔르템베르크 공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의 딸로 슈체친에서 태어났다. 독일식 이름은 조피 도로테에 폰 뷔르템베르크(Sophie Dorothee von Württemberg)이다. 아버지의 영지 몽벨리아르가 프랑스와 가까웠기 때문에 프랑스 문물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 1773년 러시아의 황태자 파벨의 신부 후보로 15명이 거론됐고 이 중에는 조피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녀가 너무 어렸기에 파벨은 헤센다름슈타트 방백의 딸 빌헬미네(러시아명: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를 황태자비로 맞았고 조피는 1776년 4월 빌헬미네의 오빠 루트비히 1세 폰 헤센 대공과 약혼했다. 그러나 황태자비 빌헬미네는 같은 해 4월 26일에 사망했는데 그 즉시 프리드리히 2세가 조피를 새 황태자비로 권고했으며, 파벨과 조피는 1776년 7월 23일에 베를린에서 약혼식을 올렸다. 조피는 루트비히에게 거액의 위자료(10천 루불)를 지불한 뒤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러시아 식 이름인 마리아 표도로브나를 받았으며, 결혼식은 1776년 10월 7일에 열렸다. 예카테리나 2세는 황태자비 마리아가 자신과 비슷한 점이 많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아들 파벨과는 사이가 무척 나빴고, 마리아 또한 시어머니 예카테리나를 꺼려 관계가 악화되었다. 특히 예카테리나가 마리아의 두 아들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을 마리아에게서 떼어 놓자 두 사람은 크게 반목하게 됐다. 1783년 마리아는 첫 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를 낳아 예카테리나로부터 방이 600개나 되는 가치나 궁을 축하선물로 받았다. 남편 파벨이 예민한 성격인데다 시어머니 예카테리나의 감시와 억압이 극심했으므로 마리아는 가치나 궁에서 힘겹게 살았다.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 즉위 이후
1796년 11월 예카테리나가 사망하자 황후가 되었으며 러시아 최초의 여학교를 세웠고 자선 활동에도 힘썼다. 즉위한 지 불과 4년 4개월만인 1801년 3월에 파벨 1세가 암살되자 마리아는 시어머니처럼 러시아의 실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대다수의 정파가 장남 알렉산드르를 지지했으므로 부득이 장남을 황제로 세웠다. 대신 마리아는 황태후로서의 지위를 마음껏 누렸다. 그러나 알렉산드르의 대(對)나폴레옹 정책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의 나폴레옹 지지를 반대했다. 특히 자신의 딸 안나 파블로브나의 나폴레옹과의 혼담을 반대하고 네덜란드의 빌럼 왕자와 혼인 시켰다.
인물
마리아는 러시아의 역대 황후 중에 가장 키가 컸으며, 심한 근시였다. 그녀는 황실의 엄격한 법도나 에티켓을 꺼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무척 즐겼으며, 몸가짐이 흐트러지는 일도 없었다. 러시아 황실의 인물로서는 드물게 검소한 절약가로 남편 파벨의 첫 황태자비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의 옷을 물려받아 입기도 했다.[1] 예술을 애호했고, 실제로 음악과 미술, 원예 등에 조예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