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피 마리아 요제핀 알비나 초테크 폰 초트코프 운트 보그닌 백작영애(독일어: Sophie Maria Josephine Albina Gräfin Chotek von Chotkow und Wognin, 1868년3월 1일 ~ 1914년6월 28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 계승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배우자이다. 1900년 호엔베르크 여후작으로 책봉되었고 1909년 여공작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남편과 함께 암살되었다. 조피의 후손들은 조피의 작위를 딴 호헨베르크가로 불렸다.
생애
뵈멘 지방의 백작 가문 출신으로[1]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의 시녀로 일하던 중,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결혼하게 되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백부인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의 귀천상혼을 강하게 반대하였고 1900년 6월 28일에야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제위 계승권을 가질 수 없다는 조건 하에 결혼을 허락했다.[1] 같은 해 7월 1일 조피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결혼하였으나 결혼식에 황제를 비롯한 궁정 귀족들은 참석하지 않았다.[1] 조피는 결혼 후에도 대공비 전하의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녀는 남편과 나란히 앉아 오페라를 관람하거나 남편의 팔짱을 끼고 무도회에 갈 수도 없었다.[2]
1914년 6월 28일, 조피는 남편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동 통치 구역이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방문했다. 환영 인파에 둘러싸인 부부의 차는 폭탄 테러를 당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그녀에게 곧장 호텔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조피는 이를 거부했다.[3] 대공 부부는 다른 일정을 마치고 폭탄 테러 사건으로 다친 부하들을 문병하러 병원으로 향했고 일정이 전달되지 않은 운전사가 길을 잘못 든 순간, 세르비아인민족주의자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나타나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목을 쏘았다. 이어서 조피 또한 배에 총을 맞았고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그녀에게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죽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지만 몇 분 뒤 부부는 숨을 거두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