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창렬사![]()
진주 창렬사(晋州 彰烈祠)는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순국 선인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년) 사액을 받은 곳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호 창열사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개요창열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기리기 위해 진주성 내에 건립되어 있다. 제2차 전투에서 많은 진주 성민이 순국한 후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였고, 선조 40년에 사액을 받았다. 후에 1868년(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곳에 모시게 된다. ![]() 창열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셔두었고, 진주목사 서예원, 창의사 김천일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의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최경회의 도장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를 올렸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새기도록 하였다.
건축물건축물로는 외삼문인 유중문과 내삼문인 전파문이 있고, 내부에는 위패가 모셔진 창열사가 있다. 좌우측에 각각 한 채씩의 건물이 있고, 선인들의 비석과 함께 박정희 전대통령이 세운 제장군졸지위라는 비석이 뒷 뜰에 세워져 있다. 창열사는 특별히 관리를 하는 문중이 없기 때문에, 관리가 잘 되지 않아 쇠락하기 쉽고, 제사도 잘 지내지 않아 조선왕조실록에도 쇠락하여 안타깝기 그지 없다는 내용이 나오며, 현재 내부에서 상주를 하며 관리를 하고, 항일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인근의 대아고등학교 전교장 박종한 선생의 의지에 따라 정기적으로 대아고등학교에서 관리를 돕고 청소를 하여, 학교 깃발이 위패 옆에 놓여 있다. 배향정사(창열사) : 7위
동사(東祠) : 15위
서사(西祠) : 17위
갤러리
같이 보기각주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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