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전범」 제27조는 천황과 황후의 무덤을 능(陵, 미사사기)으로, 황태자를 포함한 다른 황족의 무덤을 묘(墓, 하카)로 규정하고 있다. 다만 추존된 천황이나 황후, 신화 시대의 군주의 무덤도 능으로 부르고 있다.
그 외에 분골소(分骨所), 화장총(火葬塚), 회총(灰塚) 등 능에 준하는 무덤이 있으며 머리카락·치아·손톱 등을 보관하고 있는 일종의 공양탑, 피장자를 알 수 없지만 황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는 능묘참고지 등을 일본 궁내청이 관리하고 있는데 이를 총칭하여 능묘라 한다. 능묘로 지정된 고분은 천황릉이 41기, 황후릉이 11기, 황태자 등 황족의 묘가 34기로 여러 황족이 합장된 무덤을 제외하면 총 85기가 있다.
궁내청이 관리하는 능묘는 1도 2부 30현에 분포하고 있으며 천황릉이 112기, 황후릉이 76기로 총 188기다. 기타 황족의 묘는 555기가 있으며 분골소·화장총·회총 등 능에 준하는 무덤이 42기, 공양탑이 68기, 능묘참고지가 46기로 총 899기다.[1] 황실과 궁내청의 주관 하에 지금도 능묘에서는 제사가 거행되고 있으며 사사롭게 출입할 수는 없다. 연구자가 조사를 하고자 할 때는 궁내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실제 허가받은 사례는 극히 적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자체와의 합동 조사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2]
역사
고니조 천황의 기타시라카와 능센뉴지 경내의 쓰키노와 능. 고미즈노오 천황에서 고메이 천황에 이르는 역대 25명의 천황의 장례를 치른 곳이다
천황이 아직 치천하대왕이라 불리던 고훈 시대에는 거대한 전방후원분이 축조되었다. 이후 야마토 왕권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7세기 무렵부터 방분(方墳)이나 원분(円墳)으로 형태가 바뀌었으며 7세기 중엽에서 8세기 초기까지는 팔각분(八角墳)이 만들어졌다. 팔각분의 형태로 만들어진 천황릉에는 단노즈카 고분이나 고뵤노 고분 등이 있는데 이는 오로지 천황의 무덤 형태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천황의 지위를 중국 황제처럼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서 확립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토장을 하거나(쇼무 천황) 분구를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간무 천황)가 있으며 한편으로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을 하거나(지토 천황) 화장 후 납골하여 큰 규모의 무덤을 조성하지 않은 사례(준나 천황)가 있다. 준나 천황 이후에는 금상천황이 붕어하면 국가행사로서 산릉 조성이 행해져 토장되었으며 양위한 태상천황이 붕어하면 황실 행사로서 화장을 하는 관례가 확립되었다. 다만 양위 후 1년 만에 붕어하여 태상천황의 칭호를 받지 못한 다이고 천황은 금상천황의 예를 따라 장례를 치렀다. 마찬가지로 양위 후 한 달도 안돼 붕어한 이치조 천황은 생전의 뜻에 따라 태상천황의 칭호를 받지 못했지만 화장을 했다. 고이치조 천황은 금상천황 때 붕어했으나 그 사실을 숨긴 채 양위했다고 발표했으며 이후 태상천황으로서 화장을 했다.[3] 고이치조 천황 이후 모든 천황이 화장된 것은 아니지만 막말까지 산릉 조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수도 주변의 특정 지역에 능묘 지구를 설정해 나라 시대 대부분의 천황릉은 헤이조쿄 북쪽 교외에 조성되었다. 나가오카쿄로 천도한 후에도 북쪽 교외에 천황릉이 조성될 예정이었으나 10년 만에 헤이안쿄로 천도하여 실제 만들어진 천황릉은 없다. 헤이안쿄로 천도한 후에는 천황릉이 한 군데에 모여 대규모로 조성되지 못했는데 이곳에 거주하던 기존 귀족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천황은 연고가 있는 지역에 능묘를 조성하기 시작했다.[4]
원정이 시행될 때의 군주였던 시라카와 천황, 도바 천황, 고노에 천황은 불교식으로 납골하는 방식이 사용됐으며 에도 시대에는 고미즈노오 천황에서 고메이 천황까지 센뉴지 경내에 석조탑 형식의 능묘가 조성되었다. 막말에는 존왕양이의 존왕론이 크게 일어나면서 천황릉도 옛 모습대로 지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이에 고메이 천황의 무덤은 큰 규모의 분구(墳丘)가 만들어졌고 메이지 천황의 무덤은 덴지 천황의 예를 따라서 상원하방분(上円下方墳)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2013년 11월 궁내청은 천황과 황후가 붕어했을 때 토장이 아니라 화장을 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아키히토와 미치코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또한 두 사람의 무덤은 기존의 무덤보다 작게 조성할 것도 함께 발표했다.[5] 이로써 에도 시대 초기부터 350년 이상 이어져 왔던 천황과 황후의 장례 의식과 매장 방식이 크게 변하게 되었다.
황후릉은 천황릉의 동쪽에 조성했는데 이는 중국의 사례를 따른 것이었다. 실제로 청나라함풍제의 능호는 정릉이었고 이에 부인인 서태후의 능호는 정동릉이 되었다. 일본의 경우 황후릉은 천황릉의 이름을 딴 뒤 ○○동릉(○○東陵, ○○노히가시노미사사기)라 한다. 도쿄 전도 이후 천황과 황후의 무덤은 도쿄도하치오지시에 조성되었으며 다이쇼 천황 부부와 쇼와 천황 부부의 무덤인 무사시 능묘지도 이곳에 있다.
한편, 메이지 천황의 아들인 와카미쓰테루히코노 미코토의 사망을 계기로 기타 황족의 무덤은 도쿄도 분쿄구에 위치한 사찰인 고코쿠지 뒷산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다이카 이전에는 능묘 관리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일본서기』에 긴메이 천황의 무덤인 우메야마 고분을 보수하면서 모래와 자갈을 쌓아 터를 돋았다는 기록이 있다.
능묘 관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율령제하에서 이루어졌다. 다이호 율령과 요로 율령하에서는 치부성 산하에 제릉사를 두어 담당하게 했으며 덴표 연간에는 제릉료로 확대 개편됐다. 헤이안 시대 전기에 편찬된 엔기시키에는 제릉료가 관리하는 능묘의 일람표가 있는데 이 무렵에는 제릉료가 후지와라씨 등 황실의 외척의 묘도 관리하고 있었다.
다이고 천황이 붕어하자 다이고지에 능을 마련했는데 이때부터 사원에 조성된 능묘는 국가의 손을 떠나 각 사원에서 관리하기 시작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스이코 천황, 세이무 천황, 쇼무 천황의 능이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해 칙사를 파견해 범인을 추포한 뒤 유배를 보냈다. 1235년(분랴쿠 2년) 덴무 천황과 지토 천황의 합장릉인 노구치 왕묘가 도굴되었다. 범인은 3년 뒤에 붙잡혔으며 헤이안궁 앞에서 효수했다.
중세 이후 천황가의 권력이 쇠락하자 관리되지 않는 능묘가 생기기 시작했고 분구 주변에 조성한 주호(周濠)가 농업용수나 취수시설로 사용되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다카야성처럼 센고쿠 다이묘가 자신의 성으로 개조한 사례도 있었다. 에도 시대에 이르면 능묘나 주호가 사유화돼 경작지로 활용되는 사례도 많았다. 막말에 막부에서 이들을 사들이면서 대대적인 보수에 나섰는데 이를 분큐의 수릉이라 한다. 매입은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경작하고 있던 농민이나 연공을 받고 있던 번·하타모토와의 교섭 과정에서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되었다.
메이지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일본 전국에 산재한 능묘를 국가에서 정비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 있는 농민들이 많았기에 정부는 능묘와 주호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관개 용수로 사용할 것을 허용해 주었다. 또한 능묘의 청소라는 명목으로 마른 나뭇가지나 잔디를 베는 것도 용인되었다.[7]
지금은 궁내청 산하에 설치된 서릉부가 관리 주체이며 전국을 5개로 구분하여 관리하고 있다. 능묘는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으며 학술적 연구라 할지라도 원칙적으로는 허가되지 않는다. 발굴은 전면 금지가 기본 방침으로 규정되어 있다.
제사
과거에 어떤 형태의 제사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고 하나로 확립된 정설도 없다. 『일본서기』에 진신의 난 당시 훗날의 덴무 천황이 신탁을 받아 진무 천황의 능에 말과 무기를 바치면서 승전을 기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율령기 이후부터 각 능묘에서 노사키노헤이(荷前の幣)라는 국가 주관 제사가 거행됐다. 엔기시키 제릉식에서 중요한 능묘와 그렇지 않은 능묘를 구분하여 공물의 양에 차등을 두었다. 제사는 천황이 직접 참석하지 않고 귀족들을 파견했으나 귀족들은 무덤을 불길한 것으로 여겨 제사 주관 업무를 싫어했다. 또한 제사가 주로 가을과 겨울 등 추운 시기에 시행되었기에 더더욱 기피 업무가 되었다. 귀족들은 명을 받고도 제사를 거행하지 않는 등 갈수록 제사는 형해화되었지만 1350년(조와 6년)까지 지속됐다. 헤이안 시대 이후부터는 사원에 조성된 능묘에서 승려들이 불교식 제사도 거행하기 시작했다.
능묘와 그 피장자를 제신으로 하는 신사가 인접하거나 일체화한 사례도 있다. 오진 천황의 능에 인접한 곤다하치만궁은 오진 천황의 영(霊)으로 받아들여지는 하치만 신을 제신으로 모시며 제사를 주관해 왔다. 신체(神体)를 모시고 있는 사전(社殿)의 뒤에 위치한 능묘의 정상에 건물을 세워 거기까지 연결된 계단을 묘사한 그림도 남아 있는데 천황이 주관하는 제사 때 그 건물까지 신여가 행차했다고 한다. 이 문화는 지금도 남아있어 매년 9월 가을에 열린다. 에도 시대 때는 덴지 천황의 능에 천황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 무녀가 제사를 지냈다.
메이지 이후 다시 국가가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피장자의 붕어·훙서부터 3년·5년·10년·20년·30년·40년·100년이 지날 때마다 식년제(式年祭)를 지냈고 그 이후 매 100년마다 식년제를 지내기로 했다. 또한 매 기일마다 정진제(式年祭)가 거행됐다. 식년제는 칙사가 참여했으며 궁내청 간부, 연고가 있는 사원의 주지나 궁사, 지역 유력자들이 참렬했으며 황족들도 참렬하곤 했다. 천황의 식년제는 황령전에서 천황이 직접 의식을 주관했다. 정진제는 현지에서 근무하는 궁내청 서릉부 직원들만 참여했다.
수릉(修陵)은 황폐해진 능을 수복하는 것을 말한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 겐로쿠 수릉, 만지 수릉, 교호 수릉, 분큐 수릉 등이 행해졌으며 특히 막말에 시행된 분큐 수릉은 그 규모가 가장 컸다.
겐로쿠 수릉
미토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막부에 능묘의 수리를 청했지만 막부는 이를 반려한 뒤 막부가 직접 나서 수릉을 시행했다. 1697년(겐로쿠 10년)~1699년(겐로쿠 12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호소이 고타쿠가 보고를 위해 『제수주원성취기』를 썼다.
1772년(메이와 9년)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아스카와 요시노를 여행한 뒤 『관립일기』라는 여행기를 남겼는데 겐로쿠 이래 약 20년마다 능묘를 수리하고 조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분큐 수릉
우쓰노미야번이 막부에 건의해 1862년(분큐 2년) 시작했는데 이는 막말이라는 당시의 특수한 상황이 반영된 것이었다. 총 109기의 능묘를 보수했으며 이중 천황릉은 76기를 보수했다.
수릉 전과 수릉 후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으며 이를 한 데 묶어 「분큐산릉도」를 편찬한 뒤 조정과 막부에 헌상했다. 「분큐산릉도」는 현재 조정에 헌상된 것은 궁내청 서릉부가 보관하고 있으며 막부에 헌상된 것은 일본 국립 공문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산릉 탐색과 치정
천황릉의 탐색과 치정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대부분은 에도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는 존황 사상이 발흥하여 천황릉 탐색 기운이 높아졌기 때문인데 마쓰시타 겐린, 모토오리 노리나가, 가모 군페이, 기타우라 사다마사, 다니모리 요시오미, 히라쓰카 효사이 등은 능묘의 소재지를 고증하고 현지를 답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나라 시대 이전의 천황릉 중에서 덴지 천황의 능, 덴무·지토 천황의 능 등 일부만 피장자가 확인했고 헤이안 시대에서 무로마치 시대의 천황릉 중에는 간소하게 만들어졌거나 능을 관리하던 사원이 사라진 경우가 많아 위치를 특정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어 소재불명인 능이 많다.
반대로 고시라카와 천황의 호주지 안에 조성된 능이나 고다이고 천황의 뇨이린지 안에 조성된 능처럼 근세에 이르기까지 관리가 이어진 곳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오히려 소수에 속한다.
재치정
천황릉으로 알려진 몇몇 고분은 천황의 치세와 고분이 조성된 시기에 큰 차이가 있는 경우가 있다. 오다차우스야마 고분은 게이타이 천황의 능으로 치정되었는데 고분이 조성된 것은 천황이 재위한 시기보다 1세기 앞선다. 유랴쿠 천황의 능은 분큐 연간에 따로 떨어져 있던 원분과 방분을 억지로 이어놓았고 메이지 시대에 치정되었다. 반대로 고고학자들 사이에선 천황릉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공식적인 치정은 받지 않은 고분도 있다. 나카오야마 고분과 겐고시즈카 고분 등이 있는데 이 두 고분은 각각 몬무 천황과 고교쿠 천황의 능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학술적으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시각이 있으나 궁내청은 설령 잘못 치정되었더라도 이미 제사를 지내고 있으므로 천황릉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재치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8] 황실의 능묘는 어디까지나 제사의 대상이므로 일반 고분이나 묘소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 궁내청의 입장으로 이는 전전의 신기성과 궁내성 때부터 유지돼 온 방침이다. 따라서 피장자를 특정할 수 있는 사료가 발견되었거나 천황릉이 아니라는 것을 문헌이나 기록을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는 경우처럼 치정을 번복할 만한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지금의 치정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자와 모토히코는 이에 대해 현대 고고학을 통해 명백히 천황릉이 아닌 것을 천황릉으로 치정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선조에 대한 모욕이라고 지적했다.[9]
재치정이 이루어진 적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능묘의 재치정은 1912년(메이지 45년) 1월이, 능묘참고지의 재치정은 1955년(쇼와 30년) 8월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