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람 데오코람 데오(라틴어: 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혹은 신전사상(神前思想)를 의미하는데 라틴어 2개 단어인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1]라는 의미이고,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탈격(ablative, 명사를 부사처럼 사용하기 위한것)[2]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이 말은 영어 before God(하나님 앞에)인데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와 대비되는 말이다.[3] 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4]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학사상이다. 인간을 지켜보시는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도 쓰인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안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거룩한 행위이다.독일의 신학자 게하르트 에벨링은 코람 데오와 비슷한 의미로서 임재관계(Coram-Re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 개념을 마르틴 루터의 생각으로부터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면전에서 그리고 세상의 면전에서 인간의 상황을 다루는 것이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론에 대해서 관계적 존재론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 ![]() ![]() 구약성경구약에서 모세(출 18: 12)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이 친히 시내산에서 구름 가운데 임하시고(출 19: 9, 11; 20: 18), 광야에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하시며(출 13: 21-22), 또 회막에 구름기둥으로 임재하셨다(출 33: 9-11). 사무엘 상 12장 3절에 사무엘이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 ."라고 말하였다. 구약성경 시편 139편은 대표적으로 코람 데오의 정신을 보여주는 시이다.
신약성경신약에서는 제 2위 하나님되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다.[5] 그리스도는 임마누엘이 되시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런 임재적 사건은 사도 행전 4장 19절, 8장 21절, 10장 33절등에 나온다. 사도행전 10장 33절에서는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은 주의 얼굴(임재, in the presence of the Lord)과 그의 힘의 영광(위엄, the majesty of his power)이 함께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임재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 위에 존재하다'(겔37:1), '오다'(요이1:7), '이르다, 만나다'(삼상3:10), '방문하다, 도착하다'(마24:27)는 뜻한다. 성경에서 '임재'란 주로,
바울최승락 교수는 바울의 사상에도 코람데오가 나오는데 코람과 의미가 같은 헬라어 전치사들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성경에서 코람 데오는 단지 전치사(coram = before)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헬라어에서 라틴어의 ‘코람’에 해당되는 전치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카테난티(katenanti)나 에난티(enanti)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katenanti theou) 말하고자 하는 결단을 밝힌다(고후 2:17, 12:19). 엠프로스텐(emprosthen) 역시 유사한 의미를 가진 전치사이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것에 따라 아버지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거나 부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마 10:32-33). 그러나 이런 전치사들 보다 더 특징적인 전치사로 에노피온(enōpion)이 있는데, 예를 들어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enōpion tou theou)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밝힌다(갈 1:20). 에노피온은 엔(en)과 옵탈모스(ophthalmos 눈)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전치사로서 ‘안전’(眼前)의 의미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는 히브리어의 리프네(li-pnê)나 엣프네(et-pnê), 엘프네(el-pnê) 등에 맞먹는 전치사이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이 전치사들은 모두 파네(pane 얼굴)와 연결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4:23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에 세 차례 ‘하나님 앞에’ 보이도록 명할 때 엣프네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70인경에서는 헬라어 에노피온으로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전치사들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하나님 앞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면전(面前), 또는 하나님의 안전(眼前)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7] 야고보서 4장 10절 본문 "주님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에서 주님 앞에서 (in the presence of the Lord, ἐνώπιονΚυρίου)라는 코람데오는 인간의 자신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교만하지 말 것을 교훈한다.이 본문과 4장 6절에 있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제롬 성경의 사용히에로니무스(제롬)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 불가타역에 따른 코람 데오(coram Deo)에 사용된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종교개혁가들종교개혁가들에게도 이 표현은 자주 발견된다. 마르틴 루터마르틴 루터는 코람 데오를[8] 즐겨사용했는데 에벨링은 이 개념을 루터의 사상체계의 참된 근거(the very basis of Luther's mode of thought)라고 말한다.[9] 성경환 목사에 따르면 루터의 저서 《식탁대담》 중 〈세상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장에서는 루터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10]
츠빙글리울리히 츠빙글리의 신학사상에도 나타난다.[11] 장 칼뱅요한 칼빈은 코람 데오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고 그의 신학의 중요한 사상을 형성하였다.[12] 그의 명저 기독교강요 1권 2장에서 하나님의 얼굴 (the face of God)을 먼저 보지않고서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수 없다고 한다.[13] 칼뱅은 베드로 전서 3장 4절 주석에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속사람(중생한 사람)이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은 인간의 눈(코람 호미니부스)에만 치장하지 않는 값진 것(pretiosus)이라고 한다. 하나님앞에 값진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염려하는 것이라고 한다.[14]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때는 두려움과 전율을 느낀다고 한다. 하나님의 위엄이 인간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디모데 전서 6장 13절 주석에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앞에서"라는 것의 의미는 우리의 눈을 세상에서 돌려 만물을 살게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배워는 것이라고 한다.[15] 이승구 박사에 따르면 코람 데오의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16] 윌리엄 틴데일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신념 때문에 그 유능한 생애를 화형으로 마감해야 했다. 만일 그가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는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로서 존경을 받으며 장수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17] 피어선A.T. 피어선은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거룩한 삶이란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이라고 한다. 의식적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며, 하나님의 눈앞에 자신을 직접적으로 두는 삶이며, 그리고 그 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동시에 우리도 그와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숨겨진 불경건한 삶의 모든 감추어진 것들을 청소하는 것이며 우리가 우상을 포기하고 그 자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교재의 성소로 바꿔어지는 삶이라고 한다.[18] 워필드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와 더불어서 세계 3대 칼빈주의자인 미국의 벤저민 워필드는 모든 관점에서 하나님이 보고 있다라는 것을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것이 코람 데오의 삶이라고 한다. 칼뱅주의자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다. 그는 자연에서 하나님을 보고, 역사에서 하나님을 보며, 은혜에서 하나님을 본다. 칼뱅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발자국을 보고, 모든 곳에서 그 전능하신 팔의 역사하심을 느끼며, 하나님의 위대하신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다. 이 모든 사실에서 칼뱅주의를 구성하는 원리가 나타난다. 칼뱅주의자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손을 발견하며, 이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태도로 자기의 전 생애를 살아가고, 구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 안명준 교수안명준 교수는 성경해석과 관련하여 코람데오를 말한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특별히 인간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coram Deo)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고 한다.[19] 그리고 그에 따르면 다음의 몇 가지로 코람 데오의 특징을 설명한다.
임재의 연속성 연구2006년 학위논문을 쓴 황규동에 의하면 구약은 성소에서 신약은 신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고 한다.[20] 코람 데오의 신학적 특징예수를 믿는 것은 코람 데오의 정신이다.[21] 의식적으로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 하나님 면전(面前)에서의 삶, 하나님 존전(尊前) 의식[神尊意識]을 가지고 사는 삶은 다음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회개와 정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것이다.[22] 인간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야고보 4:10).
같이 보기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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