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박정희/보존2
토론 문서를 통해 독자 연구를 전개하는 행위토론 문서를 통해 독자 연구를 전개하는 행위가 빈번하게 있는 것 같습니다. 토론 문서는 문서에 대해 토론하는 공간이지 근거없는 내용을 함부로 적는 곳은 아닙니다. 또 다른 곳의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그대로 붙여 놓는 행위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토론에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의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이전 토론 문서의 역사를 참고하여 특정판 삭제를 해야 하는것은 아닌지 우려도 됩니다. --이니그마7 (토론하기) 2009년 7월 5일 (일) 00:11 (KST) 박정희 종교가? 개신교?박정희 종교가 어떻게 개신교인겁니까? 불교죠.. 황당하네요.. 엔샷 (토론) 2009년 7월 23일 (목) 14:53 (KST) 저도 불교로 보입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58 참고로 기독교 신문입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3:38 (KST) 좀 더 검색결과 박정희 공식 종교는 불교입니다. 직접링크는 불가능하고요,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http://www.pa.go.kr/index.jsp) 역대대통령에 가보시면 나와있습니다. 개신교 수정은 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4:09 (KST) 서거 혹은 급서노무현때 토론과 마찬가지로 '서거'는 비중립적인 높임 표현이므로 적지 않았으면 합니다. adidas (토론) 2009년 8월 5일 (수) 20:03 (KST) 긴급 의견 요청현재 문서에 문제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하나의 출처를 가지고 수십개의 주석을 달아놓는가 하면,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또 거의 일주일에 수십 번씩 충돌이 발생하니, 이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의견을 모았으면 좋겠습니다. --RedMosQ (토론) 2009년 8월 10일 (월) 14:53 (KST) 출처를 중요시 한다면서비방하는 내용은 출처가 없어도 막 올라 올 수 있다는 것은 이중잣대가 아닌가요? 조선, 동아, 한겨레 등은 상당히 한쪽으로 치우쳐졌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내용이 많기 때문에(특히 한겨레측의 내용은 더욱 신뢰할 수 없음.) 예를 들면 조선일보에서 박정희를 개신교라고 왜곡하고, 한겨레에서 전두환을 불교라고 왜곡하는 부분 등 큰 신문사라 해도 잘못 된 내용이 매우 많음.(실제 전두환은 개신교 신자임.) 그리고 개신교 신자들이 자꾸 박정희 대통령의 종교를 근거도 없이 개신교로 자꾸 고치는데 그건 근거도 없는데 관리자가 왜 방조합니까? 이런다고 내가 인신공격한다고 말 할 수 있습니까? 근거 없는 낭설들을 그대로 실으며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중립성과 사실성이 0에 가까운 글들이 그대로 실려 중립성을 완전히 훼손하고 있음에도 불과하고 관리자는 의도적으로 방치하며 관리자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이 달리면 무조건적으로 트집을 잡아 삭제시킴. 박정희 대통령이 개신교라는 근거도 기독 민주당빠들에게는 제시되지 않고, 박정희 대통령이 민주화를 탄압했다는 근거도 전혀 없으며, 증거가 불충분한 몇몇 만화에서 나온 얘기들을 사실인척 그대로 위키에 게시하여 노골적으로 한 인물을 매도, 비하하는 장으로 변질시킴. 술잔을 집어던졌다는 얘기 등은 대표적인 매도, 폄하용 만화 스토리. 인신공격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육두문자가 들어있나? -- 이 의견을 작성한 사용자는 211.117.177.161 (토론)이나, 서명을 남기지 않아 다른 사용자가 추가하였습니다. 2009년 8월 10일 (월) 15:59 (KST)
사상박정희는 소학교 당시 기독교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동급생이었던 한성도에 따르면 "박정희와 저는 처음에 유년 주일학교에 나왔다. 구미 보통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일요일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하는 주일학교에 열심이었다. 소년들이 막 코흘리 개의 때를 벗을 무렵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한복차림으로 교회에 모여들던 시절이다. 우리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기도하는 법이었지요" 라고 하였다. 박정희는 사회주의 활동도 하였다. 1962년 6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최고위원들과 함께 김포로 가서 모심기를 할때, 논두렁에 앉아 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한 기자가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1] 나는 원래가 유신론자입니다. 하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안주시는 것이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한 일도 있었다.[1] [1]
공산주의 활동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5] 당시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6] 한국의 군사 정권에 좌익과 공산주의 성향을 내포한 자들이 많은 것은 일제 말기의 농촌 상황과 도시 영향력에 기인한다. 당시 한국에는 지주제도가 확산되었고 지주제도는 통상 총독부와 관련이 깊었다. 대도시, 특히 대구와 서울에서는 교사 등의 지식인들이 정부를 비난하거나 내심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인과 한국인 교수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컸다. 박정희와 그의 형제들은 대구 근방의 기차 정거장인 구미 근처에 사는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김종필과 여섯형제는 대전 인근의 부여 근처에 사는 중간 규모 지주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김종필의 부모는 김종필이 어릴 때 재산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두 사람은 총명했으며, 그들은 개인적인 상황이나 국가적인 상황을 절망적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개인과 국가의 진로를 폭력적인 견지에서 보았을 것이다. [7] 박정희는 일찌기 대구에 있는 사범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박정희를 가르쳤던 교사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전 북한 외교 통상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에 그와의 접촉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일본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학생들의 분위기는 적대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절친한 교우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왕학수와 황용주 같은 박정희의 급우나 김종필의 친구들이 지금 박-김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7] 박정희는 1937년에 대구 보통 학교를 졸업했지만,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1940년의 일이었다. 그가 3년 동안의 공백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좌익 책자를 읽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 군관학교의 동기 세 명이 나중에 쿠데타에 동참했다. 박정희는 5백명의 동기 가운데 성적 최상위자로 선발되어 자마에 있는 일본 사관학교 제57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박정희가 사관학교를 다니던 2년 동안 좌익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9명은 박정희의 후배로, 동양적인 제도에서는 특히 그의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었다. 이들 후배들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훗날 박정희가 지휘한 공산주의 음모에 개입하게 되었다. 한국 사관학교 교관들로 그와 공모했던 사람들 가운데 7명은 그 결과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와 그의 동기생들 사이에 좌익 영향의 징후는 생도 시절에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도쿄에서 2년제, 혹은 4년제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엘리트가 박정희와 더불어 좌익으로 돌아섰다. [7]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형 박상희의 죽음이라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7], 광복 직후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하다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해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사상공세를 당하기도 했다.[5] 한국 군사 정부의 핵심 세력이 과거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였고 혹은 대규모 정부전복 기도에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박 의장 본인은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의 핵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종필은 대학 재학시절 좌익분자였으며, 그 후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옹호하고 그들과 어울려 지냈다. 박 의장과 김종필의 가족 중에는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에 협력한 사람들이 있다. 중앙정보부 내의 김종필 측근들은 좌익이나 공산주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며, 그들은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박의장의 고문진과 동료들 중에도 과거의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박정희의 정당인 공화당에는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7] 박-김 정권의 운영 방식은 어느 정도 이런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속임수, 증거 없는 기습 체포, 공갈, 정치 뇌물, 테러 전술이 자주 동원된다. 또한 의심스러운 것은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중앙정보부의 지배적인 권력이다. 일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고문진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는 이 조직은 공화당, 국가재건최고회의 등 주요 기관을 만들어 내고 있는 주역이며 겉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면서 신원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중앙정보부와 관련된 지도부 내의 핵심 세력에 의해 빈틈없이 조직되고 통제된다.[7] 1960년 12월에 ‘16인 장교사건’에 개입되어 군복을 벗을 때까지 김종필은 상대적으로 무명의 장교로, 일부 연수 기간을 제외하고는 군 생활의 전부를 G-2에서 보냈기 때문에 군인으로서 출세할 가망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전기(傳記) 기록도 드물다. 박정희가 대구 사범학교 시절을 조용히 보냈던 것에 비해, 김종필의 서울 사범대학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8] 1946년에 미군정은 서울대 사범 대학을 비롯해 몇 개의 대학을 통합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일부 대학, 특히 좌익 교수단과 학생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미군정의 명령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독립 지위를 상실하면 미국의 감시가 강화될 것을 우려했다. 사범 대학은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이 싸움에서 좌익의 입장을 견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김종필과 중앙정보부에 있는 그의 측근 김용태, Korean Republic의 발행인인 김동성, 동양 통신(Orient Press)의 김규환, 전 공보부 장관 이원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8] 여기에 개입된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해 보면, 분명히 공화당 총무인 김동환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드러날 것이다. 박정희가 사관학교에서 조직을 형성했던 것과 거의 같은 때에 그의 조직과 비슷한 또 다른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질 수 있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종필과 김용태는 불온한 사건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사범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대전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로당으로 지역 청년들을 전향시키는 일을 했다고 한다.[8] 김용태는 1948년에서 1950년까지 장항 여자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김종필과 김용태는 그 지역의 좌익분자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강한 세력을 누리고 있던 이범석의 우익단체와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실은 쿠데타의 지도부들이 처음부터 이범석 장군과 그를 따르는 청년단에 강한 적개심을 보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좌익분자들에 대한 단속이 진행되자, 일부 좌익분자들은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당시 조직 확대를 위해 청년들을 필요로 하던 장교 양성소와 군방첩대(CIC)에 들어가는 길을 모색했다.[8] 김종필은 여수 순천 사건을 계기로 장교 후보 선발에 보다 엄격한 안보 규정을 적용하기 직전인 1948년 8월에 장교 양성소의 예비학교인 지도자 양성소에 입학했다. 그는 동기생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해 자신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곳을 졸업하였고, 곧 G-2에 들어가서 박정희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김용태를 G-2의 문관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8] 박정희와 김종필, 김용태의 가족들에게 좌익과 공산주의 영향이 퍼져 있다는 사실은 조기 환경 요소의 효과를 여실히 입증해준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공산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1946년 10월 2일 시위와 그로부터 1년 뒤에 다시 대구를 휩쓴 격렬한 좌익 시위를 지도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상희는 북한의 전 외교통상부 부위원장을 지낸 황태성과 절친한 관계였음이 분명하며, 황태성은 1946년의 시위 후 대구를 떠났다가 1961년 9월 1일에 간첩 임무를 띠고 박의장과 접촉하기 위해서 서울로 돌아왔다.[8] 박상희의 또 다른 동료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정책 자문으로 있는 윤장혁으로, 그는 1948년의 대전 폭동을 지도했으며, 1955년 11월 7일 북한을 위한 간첩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박상희가 정확하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1946년에 시위를 주동한 죄로 미군정에 의해 사형된 것으로 보인다. 김종필의 장인이 바로 박상희이며, 김종필의 처는 아버지가 죽은 뒤 거의 박정희의 딸처럼 키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뿐만 아니라 김용태를 비롯한 남편 측근들의 지위 유지에 적극적이라고 한다.[8] 김종필의 6형제 가운데 전부는 아니나 몇 명은 1950년에 북한이 남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6형제 가운데 김종식은 그의 걸출한 형제 김종락이 인정하듯이 북한에 있다. 김종필의 또 한 형제는 충청남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죄로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현재 고향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 형제는 남로당원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 후 김종필이 그의 체포를 막았다고 한다. 김종필 형제가 남로당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모든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온 원인중 하나였다.[8] 김종필과 절친한 사이인 김용태의 가족도 그 지역에서는 김종필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악명이 높았다. 1945년 이후에도 좌익분자였으며 남로당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김용태는 공산주의자들이 대전을 점령했을 때 고위직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3형제 역시 공산주의에 협력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소련에서 전쟁 포로 생활을 한 뒤 모스크바 대학을 다니다가, 현재는 한국에 돌아와 공산주의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1945년에서 1951년까지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현재 한국 중앙정보부와 박-김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으로는 중앙정보부의 장태화, 조칠기, 반미적이고 중립적인 부산일보의 발행인인 황용주,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전(前) 고문인 김성희, 재무 고문이자 운영요원인 김성곤 등이 있다.[8]
대한민국 공산화 음모남로당 공산주의자들 중 이주하, 김삼룡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면서 동일한 서열의 최고위간부로 이중업(李重業)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33년에 공산주의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그 후 이중업은 박헌영, 이주하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활동했고 해당 기간(47년말-48년초) 동안에는 남로당의 조직부장(Chief of the Organization Departement) 직을 맡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작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한국 국방경비대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1945년에서 1948년 9월 사이 이 조직에 침투한 것이었다. [7] 이때 이중업은 박정희를 비롯해 많은 장교들과 접촉한 듯하다. 이중업이 접촉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중있고, 가장 성공적으로 접촉한 장교는 박정희였다. 이중업과 박정희의 접촉은 박정희가 중국 광복군에서 김홍일과 근무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한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박정희는 1946년 12월에서 1947년 2월까지 제1연대의 중대장으로서 사관생도들 중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모집하는 데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7] 제1연대는 당시 태릉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제1연대 건물에 새로 생긴 장교 양성소(사관학교)가 있었다. 당시 연대 장교들은 새로 생긴 장교 양성소의 교관 역을 겸했다. 당연히 이 장교 양성 과정은 생도 시절의 젊은 장교들에게 사상을 주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회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사관학교에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참모를 많이 포함시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고, 박정희는 이런 노력에 앞장 선 듯 하다. 1947년 3월과 4월에 졸업한 제3기생들이 교육을 받은 건 박정희가 이 연대에 있을 때였다. 제3기는 주로 전직 사병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국의 한 고위 장성은 공산주의 성향을 지닌 어떤 장교가 자신의 사병들을 장교 연수 과정에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말했다. 현재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한국군의 G-3(작전국)는 300명의 생도들 가운데 절반이 노골적인 불충분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7] 948년 10월 19일에서 27일에 여수-순천 반란을 일으킨 건 이들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1948년 4월에 제주도 제9연대에서 처음 발생한 소규모의 전복기도를 비롯해, 1948년 11월 2일에 발생한 대구 제6연대 사건, 1948년 10월 20일에 발생한 제4연대 사건, 1948년 11월에 발생한 대전 제2연대 사건에도 개입했다. 이 사건들의 결과, 많은 장교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했으며, 많은 장교들이 여수 순천 반란에서 목숨을 잃고, 또 일부는 순천과 대구에서 달아나 게릴라가 되어 1949년 4월부터 한국 전쟁이 날 때까지 한국을 유린한 게릴라전을 지도했다.[7] 박정희가 이 심각한 사건들과 전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확실하다. 그가 정체를 드러내고 1950년(1948년의 잘못인 듯) 11월에 체포된 것은 이들 사건들, 특히 여수 순천 사건 때문이었다. 박정희 혼자 사관생도들에게 불온사상을 주입하는 주역을 맡은 건지, 이정업과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이들과 접촉하는 데 적극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와 이중업은 이 기간 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이들은 워싱턴 주재 현 한국 대사인 김정열 중장에게 각각 친분 사실을 증언했고, 최경록 중장(퇴역)은 이들이 이중업이 즐겨 찾던 명월관에서 몇 차례 함께 술을 마시는 걸 목격한 바 있다고 증언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한 한국 정부 전복 도표를 본 어느 한국군 장교는 거기에 박정희의 이름이 주요 군 장교로 나타나 있더라고 회상했다. [7] 박정희와 장교 양성소와의 관계는 이렇게 짧은 기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정희는 1947년 9월에서 1948년 9월까지 육군 사관학교에 있는 학생 파견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중요한 직책에서 그는 공산주의 영향을 받은 교관들로 참모진을 구성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지도자로 생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7] 여수 순천 사건과 그 뒤를 이은 수사 결과 박정희 조직은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1949년 2월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박정희는 죄의 심각성에 근거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7] 이런 극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의 동창생들이 육군 고위직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박정희는 자신이 참회했으며 사면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조직망을 폭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박정희는 그 뒤 김창룡 수사대의 수사에 합류했으며, 공모자들의 집으로 수사대를 직접 이끌고 가기도 했다. 그가 직접 폭로한 사람의 숫자와 신원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지만, 10여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는 그의 부하 장교들도 있었다. 자신의 체포가 바로 조직 지도자의 배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다른 사람을 폭로했고,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폭로했다. 당시 이런 상황을 지켜보았던 관측통은 아마도 수 백 명의 좌익분자들, 주로 군 장교들이 이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7] 이중업도 여기에 포함되어 1949년 4월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중업은 그해 7월에 딸이 간수를 유혹하여 대한민국 헌병복을 입혀 북한으로 인도함으로써 탈출에 성공했다. 이중업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해서 한국 군내의 정부 전복 기도는 제거되었으며, 이 음모가 진행되었다면 한국 전쟁 초기의 혼란 이상의 혼란상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7] 이에 대한 보상으로 채병덕 참모총장과 정일권 부참모총장, 특히 G-2(정보국)의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 구명을 탄원했고, 그 결과 박정희는 징역 10년으로 감형을 받고 군복을 벗었다. 박정희는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으며, 그 후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를 G-2 분야의 문관으로 고용했다. 이런 위치에서 박정희는 1949년 봄에 졸업하는 제 8기생들 가운데 똑똑한 젊은 장교들을 G-2 분야에 추천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종필을 비롯해 젊은 시절에 좌익 성향을 지녔던 일부 장교들이 박정희의 후원으로 G-2에 들어갈 수 있었거나, 적어도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분명히 박정희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김종필은 1949년 5월 이후 계속 G-2에 있었다. [7]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의 성실한 근무에 만족했고 한국 전쟁이 시작되자 즉각 그의 한국군 재입대를 추천했다. 과거 엄청난 공산당 음모를 꾸미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부하에게 고문과 죽음을 안겨준 그의 성격도 드러났다. 음모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박정희 한 사람 뿐이었지만, 박정희는 그 음모를 주도한 실질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7]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9] 그러나 총리 장면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9]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했습니다.[9]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10]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9] [9] 박정희 정부군사 정부가 만든 국가 구조는 박정희와 김종필, 그리고 그들의 고문들이 군사독재적인 형태를 창출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8] 그 첫 번째로는 한국의 중앙정보부로 그것은 사실상 국가 내의 국가 역할을 한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고문들이 정책, 안보 체제, 대부분의 중요한 외무와 경제문제, 사법, 언론, 라디오, 심지어는 문화행사의 중요한 부분까지 통제하고 있다. 민주적인 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소한 예산 문제에까지 결정권을 허락하지 않는 중앙정보부는 군사독재적인 통제기관 이다.[8] 국가 재건 운동은 대규모 조직으로, 겉으로는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대부분 육군 준장 출신의 부의장과 그의 참모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국가 재건 운동’은 농촌 지역의 젊은이들을 선동해서 ‘공중 도덕 회복’과 각종 주택개량 사업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 조직의 매력은 한국 생활의 전통적인 봉건주의적인 형태를 반대한다는 데 있다. 이 조직은 필요할 경우에 폭력적인 정치 행위에 쉽게 전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농촌 청년 조직과 유사하다.[8] 정부의 주요 정치기구인 공화당의 구성을 보면 대외적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들은 대개 중앙정보부에서 임명된 정체를 알 수 없는 직원들로 구성된 내부 사무 조직의 하수인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 조직이 구성되는 방법은 매우 의심스럽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대령 한 명과 소령 두 명이 대학 교수나 직장이 없는 무명 정치인, 혹은 지식인에게 주로 밤에 접근해, 조국의 이익을 위한 막연한 계획에 동참하라고 돈이나 협박으로 그들을 유인한다. 그 계획에 동참을 거부하는 사람은 통금 시간 후에 조사에서 풀려나게 되며, 그렇게 되면 그들은 통금 위반으로 체포되거나 그들이 속한 단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8] 한국인들은 일제시대 때부터 스파이와 앞잡이에게 통제 받는 데 익숙해 있다. 군사 정권은 이 제도를 확대 정비해 이승만 대통령 시절보다 더 큰 규모로 만들었다. 돈을 받고 야당 내에서 분쟁을 조장할 책임을 맡은 ‘사쿠라’ 정치인들이 최근 군사 정권의 한 특징이 되고 있다.[8]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는 혼란에 대한 절망감과 전(前) 지도자와 정당(정치정화법과 ‘사쿠라’), 은행과 통화(환율과 인플레이션), 금융 기관(주식 거래 불시 단속), 기업과 기업가(폭리 기업인 단속과 민간 기업의 경영권 인수), 군(정화와 정치적 임명을 통해), 미국(공적, 사적 언어 공격을 통해) 등에 대한 신뢰가 체계적으로 붕괴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무능한 통치력의 징후인지, 남한 사회의 제도와 자신감을 파괴하려는 치밀한 계획의 징후가 아닌지 점점 의심을 키워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8]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이유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 했다고 한다.[11] 여성 편력 의혹한 중정부 직원은 박정희의 시중을 들기 위한 '마담'이 200명 가량 있었다고 증언했다. 안가에서 술자리 모임이 생기면 이 중에서 면접을 통해 접대 여성을 선발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중정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의 증언에 따르면 '대통령의 여인' 중 수십 명이 1980년대에도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12] 김재규 중정부장의 변호사였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접대하기 위한 여성의 수가 200명을 넘었으며, 그 중 가수 심수봉 등 연예계 종사자가 가장 많았다."고 했다. 육영수는 주색에 빠져 항락에 젖은 박정희와 부부싸움을 하다가 얼굴에 심한 멍이 들었다고 한다. [13] [14][15] 박선호는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으로는 이미 유명해진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하였다고 한다. 그중에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고 주장했다. 박선호가 구해 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박손호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도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 할 이름이었다고 평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고 하는데 우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등이며,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등등이라고 하며 박선호와 한 중앙정보부 직원 등 이 같이 증언하였다. [16] [17][18] 이것에 대해서 다른 사용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팔산천개청명오약신도 (토론) 2009년 8월 16일 (일) 12:53 (KST) 신동아와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는 신뢰할 만한 출처라고 생각합니다. 단 문서내에서 전체적인 균형을 생각해서 기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문단의 제목도 중립성을 담아냈으면 좋겠습니다. '편력증'이라고 하니 무슨 병에 걸린 것 같은데, 당시 사회적으로 볼 때에도 그렇게 판단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케골 (토론) 2009년 8월 31일 (월) 19:36 (KST)
보호조치알림보호정책에 의거, 편집 분쟁의 지속을 이유로 해당 문서를 보호합니다. 보호된 버전에 관하여 그 내용이 정확하거나 중립적임은 보장하지 않습니다. 보호기간은 1주일입니다. 일주일간 성실한 토론을 통해 편집의 타협점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hun99 (토론) 2009년 8월 18일 (화) 13:28 (KST) Kbr0706 사용자의 박정희,김대중 문서훼손에 관한 토론사용자:Kbr0706는 박정희 문서에 정확한 출처가 있는 사생활 관련부분을 완전히 삭제하였습니다. 하지만 김대중 문서에서는 사실확인이 제대로 들어나지 않은 의혹에 관해서 끊임없이 문서등록하는 이중적인 행동을 보이며 중립성과 형평성을 너무 무시하는거 같습니다. 또한 박정희 문서에서 객관적이고 출처가 있는 비판적인 내용은 삭제해 버리는 성향이 있습니다.다른 인물을 깍아내리거나 폄하한다고 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이 돋보이지 않습니다.유치하고 편협한 생각은 자제해주세요. 중립성과 형평성을 지켜주세요.--To to (토론) 2009년 8월 26일 (수) 02:21 (KST) 여성편력에 대한 부분이 편집 논쟁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우선 해당 출처가 신뢰할 만한 출처인지 검토를 해 보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문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중립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지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관적인 판단이 필요하므로 여러 사람들이 총의를 모아서 판단을 해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삭제와 삽입을 반복하지 마시고 토론문서에서 토론해주세요. --케골 (토론) 2009년 8월 28일 (금) 11:18 (KST) 편집 분쟁 우려되돌리기 싸움을 중지하시고 토론을 하십시요. 몇 일전에 본 문서에서 편집분쟁을 일으키셨던 두 분이 동시에 편집금지를 당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케골 2009년 10월 1일 (목) 22:26 (KST)
편집에 대해서해당판에 편집한 부분에 대해서 몇가지 지적할 점이 있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저작권 위반
긍정적인 부분 삭제
대부분 제3,4공화국에서 서술되어야 합니다. 이는 김영삼, 김대중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공산주의자 라는 건 상식아닌가요?? 인정할건 인정하셔야죠.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5일 (월) 10:20 (KST)
오류1.독립군 대부분이 충칭으로 갔다고 하는데 만주,화북지역에서도 동북항일연군,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기타 일본과 친일파 유치환이 비적떼라고 칭했던 사람들 모두 독립군들 입니다. 2. 박정희는 반공주의가 아니라 반공주의를 가면 삼아서 민주운동가를 고문한 것 뿐입니다. 3. 제3공화국은 1962년 12월 19일 이후입니다. 4. 새마을 운동은 미국 4H운동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새마을 운동에 대한 평가가 곧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다. 5. 한겨레신문이랑 경향신문이랑 오마이뉴스랑 신동아도 엄연한 출처입니다.--Saga288 (토론) 2009년 10월 6일 (화) 11:28 (KST) 1.독립군 대부분이 내륙인 충칭으로 이동하였다는 내용은 엄연히 개정 7차교육과정 국민공통과정 중3~고1 국사교육과정에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2. 그것은 토론자님의 견해로 밖에 보이질 않네요..
3. 엄연히 현행 국사 및 근 현대사 교과서에서 제3공화국을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정부 출범 이후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4. ‘대통령 박정희는 수재민 복구대책과 아울러 넓은 의미의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하여 자조·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마을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이것을 새마을가꾸기운동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서 시작되었다.’- 두산백과 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4H운동에서 유래되었다는 정확한 근거가 있으셔야죠..또한 새마을운동중앙회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시작을 1970년 04월22일 "새마을가꾸기운동 제창 (전국지방장관회의,부산) 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5. 백과사전에 밝혀지지도 않는 개인의 신상까지 게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이는 타 문서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켜지고 있구요. 또한 위에 121.124.4.51님이 지적한 문제에 대해서도 답변부탁드립니다. -- 사용자:pba3321 2009년 10월 6일 (화) 21:24 (KST)
공산주의와 관련된 내용이 너무 길고 정리가 안되어 있습니다.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핵심적인 문장들로 추렸으면 좋겠습니다. 여성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할 내용이 많다면 박정희의 사상 혹은 박정희의 사생활 등으로 문서를 분리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케골 2009년 10월 8일 (목) 13:09 (KST) "부마사태"아니고 "부마항쟁"입니다. Unobedient54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21:19 (KST) 두 분의 편집 분쟁에 개입할 생각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멀쩡한 분류는 왜 자꾸 되돌리기를 해서 똑같은 작업을 이중 삼중으로 하게 하십니까? 두 분의 사용자 토론에도 분명히 주의해달라고 글을 남겨놓았는데, 분류: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군인을 분류: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으로 전체 분류를 변경하면서 이 문서의 해당 분류를 수정했던 것이고, 박정희가 한국전쟁 당시 보병부대 지휘관으로, 그리고 포병학교 교육을 거쳐 포병으로 전과하면서 한국전쟁에도 참전했기 때문에 분류:대한민국의 군인을 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두 분의 편집 분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인데, 이걸 자꾸 아무 생각없이 예전으로 되돌립니까? 분류에 붉은 색 링크를 남겨두고 싶으신 겁니까? 마지막으로 이 분류를 삭제한 분은 사용자:Saga288님이시더군요. 전쟁 중인 상대방이 편집한 문서를 예전으로 되돌리고 싶으면 되돌리십시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는 내용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막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WaffenSS (토론) 2009년 10월 6일 (화) 20:55 (KST) Saga288님 답변부탁드립니다.토론자님께서 그 근거를 가지고 있으시다면 출처를 밝혀 공론화 하실 일이지 '~~이러한게 있다'라는 식으로만 답변하시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토론자님의 답변은 거의 위와 같은 식이라 토론이 진전이 없네요.. -- 사용자:pba3321 2009년 10월 7일 (수) 19:32 (KST)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식아닌가요. 당연한 사실 아닌가요. 이런식으로 답변하시면 토론이 진행이 안됩니다. 일단 큰 문제를 살펴보자면 1. 저작권 문제 : ip님이 제시한 대로 외부 기사를 일부도 아니고 통째로 복사&붙여넣기하면 저작권 위반입니다.
2. 공산주의자문제 : 공산주의적 부분적경향을 가지고 전체로 판단해 공산주의자 반열에 놓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국가가 공산주의적으로 흘러간거까지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히틀러는 공산주의자가 됩니다. 제가 알기로 3공화국 시절 사유재산에 대한 제제는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아니라면 증거를 제시해 주세요.
3. 3공화국 문제 : 공화국 순서 구분은 정권순서로 나옵니다. 이승만 정권 이전 미군정 시절을 1공화국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통령 정권 이전의 정변-선거 기간은 2공화국 으로 분류해야 합니다.
아니 다른건 다 둘째 치고 원본이랑 다르다고요?????? 한글을 글자 하나 빼놓지 않고 똑같이 썻는데 이게 원본이랑 다르다는 말은 대체 어서 나오는지 모르겟네요. 프레시안 기사와 좀 비교해 보시죠? 프레시안 기사를 아주 복붙햇는데 원본이랑 다르다니요? 한국의 군사 정권에 좌익과 공산주의 성향을 내포한 자들이 많은 것은 일제 말기의 농촌 상황과 도시 영향력에 기인한다. (이후 생략 : 프레시안 기사중 일부분) 한국의 군사 정권에 좌익과 공산주의 성향을 내포한 자들이 많은 것은 일제 말기의 농촌 상황과 도시 영향력에 기인한다. (이후 생략 : 위키백과 내용 ) 글자 하나, 뛰어쓰기 하나까지 같습니다. 이걸 아니라고 주장하시면 귀막고 토론하시는 거네요. 반달행위로밖에 볼수 없습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3:15 (KST) 일단 명백한 복붙인 프레시안 기사부터 삭제했습니다. 덤으로 박정희의 종교도 자꾸 개신교로 고치시는데, 위에 종교 토론 언급에 명백한 박정희 종교 개신교 출처를 남기시기 바랍니다.--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3:32 (KST) 아. 여기도 고쳐야 겟군요. 박정희 종교는 명백히 불교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찾았습니다. --yhpdoit (토론) 2009년 10월 10일 (토) 04:10 (KST) 그럼 이건 어떤가요?? 중앙일보 내용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은 40여 분간 카터에게 주한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강의’했다. 화가 난 카터는 배석했던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 “이 자가 2분 이내에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나가 버리겠다”는 메모를 건넸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한·미 정부와 민간이 모두 말린 결과 카터는 3000명가량 감축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 [2]
글자 하나, 띄어쓰기 하나까지 같습니다. 이것도 저작권 위반 아닌가요??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11일 (일) 00:46 (KST)
문서 구조 제안문서의 구조가 균형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이런 구조로 서술을 해 볼 것을 제안해 봅니다. --케골 2009년 10월 8일 (목) 13:07 (KST)
현재 문서에 연보가 들어 있습니다. 연보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뒤 쪽으로 위치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케골 2009년 10월 9일 (금) 06:33 (KST) 제3공화국 기간에 대해계속해서 근거도 내놓지 않으시면서 박정희의 대통령권한대행 기간을 3공화국 범주에 넣으시는데요.. 저는 대학에서 우인수 교수님께 분명히 제3공화국의 출범을 1963년 12월 17일로 배웠습니다.. -- 사용자:pba3321 2009년 10월 5일 (월) 19:55 (KST) 제3공화국의 정권이 출범했다는 말과 다르죠. 제3공화국의 헌법은 이미 5차개헌때 부터 시작되었습니다.대한민국의 정치에서도 1962년 시기를 제3공화국으로 보네요. --Saga288 (토론) 2009년 10월 9일 (금) 02:04 (KST)
교사를 하다 만주로 떠날 당시의 행적에 대해박정희가 일제시대 조선인 중에서는 최고의 출세길인 대구사범을 졸업했음에도 갑자기 교사를 버리고 만주로 떠날 당시의 행적에 대해 이 문서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설에는 일본인 교장과 싸워서 홧김에 사표를 던지고 만주로 떠났다는 설도 있고, 정말 군인이 되고 싶어서 떠나면서 문경보통학교 학생들이 울었을 때, 박정희가 "너희들은 모른다. 긴 칼 차고 대장되면 군수보다 너의 선생님이 더 높다."라고 말했답니다. 또한 박정희는 만주 신경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나이제한에 걸리자 특단의 아이디어를 냅니다.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란 한자 문구를 혈서로 써서 신경군관학교에 보내지요. 박정희의 이러한 행적은 당시 만주일보에 실렸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전부 사실이지만, 저는 출처를 제시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박정희 관련 문서에 이 내용도 출처를 찾아 실어주셨으면 좋겠군요.--崔元義 (토론) 2009년 10월 28일 (수) 22:11 (KST) 황태성 사건에 대해박정희의 레드 컴플렉스를 거론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황태성 사건'입니다. 북한은 5.16 쿠데타 직후 과거 좌익이었던 박정희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황태성(대구폭동 때 우익의 총을 맞아 죽은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친구)을 남파하였습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어찌된 영문인지 황태성을 그냥 사형시켜버립니다. 아마도 그의 과거 좌익 경력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문서에는 박정희와 대구폭동, 그리고 황태성에 대해서는 내용이 없군요. 이 부분도 좀 보완되었으면 합니다.--崔元義 (토론) 2009년 10월 28일 (수) 22:11 (KST) 보호 알림편집 분쟁을 이유로 1주 보호합니다. 참여자들께서는 1주 동안 적절한 토론과 타협을 통해 반영할 내용을 상의해주세요. 되돌리기를 그냥 하는 편집 분쟁의 형태는 지양해주시고, 위키백과의 정책과 지침에 알맞게 상호 타협점을 찾아주세요. 보호 이후에도 되돌리기를 반복하시는 분은, 극심한 편집 분쟁의 태양으로 인해 위키백과의 협업 정신에 위반되는 행태로 간주, 차단하겠습니다. --hun99 (토론) 2009년 11월 19일 (목) 23:43 (KST) 10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대통령 박정희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아프리카 소말리아보다 못 살던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구한 민족의 영웅입니다. 1960년대 초반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나라를 한번 잘 살아보자고 하면서 이끄신 분이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박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과 나라 사랑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소말리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5.16 군사혁명과 데모를 일삼던 대학생들을 때려잡은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은 사상이 빨갛게 물든 사람들이거나 먹고 살만 했던 사람들 입니다. 좌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아이러브 위키백과 (토론) 2009년 11월 26일 (목) 19:40 (KST)
독재자에게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이거 너무 억지 주장 아닌가요? 아무리 언론에서 그렇게 보도하고, 일부 세력들이 그렇게 평가한다고는 하지만 독재자가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은 출처가 분명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네요. 박정희가 반민주주의, 독재, 탄압으로 대변되는 것은 학자들은 물론 역사, 언론에 관심 없는 일반 국민들도 전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브리태니커를 비롯한 기타 포털싸이트 백과사전에서도 그런 해석은 있는곳이 전혀 없습니다. 일단 '반민주주의'라는 내용이 있는 지금 상태에서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는 말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를 없애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토론해봅시다.--Park6354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4:26 (KST) 일단 출처언론이 공신력이 부족한 곳 입니다.%Les Templiers% et %Templiers Noirs Discussion Histoire 2009년 11월 30일 (월) 14:34 (KST)
딴건 몰라도 유신독재를 했던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는 말은 어불성설인 듯 하군요. 121.124님께 되묻습니다. 박정희가 독재자가 아니라는 출처는 어디에 있나요?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만들었지만 독재자가 아니었다는 출처? 163.152.102.254 (토론) 2009년 11월 30일 (월) 18:33 (KST)
박정희는 군부 독재자 아닌가요? 그런 사람이 무슨 민주주의 발달에 기여했다는 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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