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당시 평안남도평양에 설립된 근대 교육 기관이다. 줄여서 평양고보(平壤高普)로 흔히 지칭한다.
1909년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서울 경기고)의 전신인 한성부의 한성고보는 4년제였으나 평양고등보통학교는 3년제 학교로 출범했다. 대구의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의 대구 경북고), 서울의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지금의 서울 경복고)보다 먼저 설립되어 두 번째로 생겨난 관립학교였다. 학생들은 교모에 '가는 백선 두 개'를 둘러 두 번째로 설립된 '제2고'임을 내세웠다.
이후 평양고등보통학교로 본격 개칭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명문 학교로 꼽히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24년경성제대의 예과에서 처음으로 신입생을 뽑았을 때 조선인 합격자는 44명이었다. 이중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가 가장 많은 15명을 합격시켰고, 평양고등보통학교는 6명으로 2위, 대구고등보통학교가 5명으로 3위였다.
그리고 1945년 일본 패망 및 광복(8·15 을유 해방)이 도래한 이후 동년(1945년) 9월 18일 당시 평양고등농림학교(평양고농)를 통폐합하였으며[1] 1947년 3월 11일 당시 평양상업고등학교(평양상고)와 진남포상업고등학교(진남포상고)를 통폐합하였고[2] 1948년 3월 1일, 평양제2중학교(평양2중)로 개칭했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후 같은 해(1950년) 9월 1일 당시에 폐교(평양1중과 통폐합 및 평양남산고급중학교 개편)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고 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는 1950년 제39회 졸업생이 마지막 졸업생이다.
↑평양고농(평양고등농림학교)은 1911년 9월 1일 설립 및 개교 후 1945년 광복(8·15 을유해방)이 도래하고 나서 1945년 9월 18일 당시 평양고보(평양고등보통학교)에 통폐합 조치 처분된 이후 1946년 10월 1일 당시 김일성대 농학부 농학과 과정으로 이관 조처됨.
↑평양상고(평양상업고등학교)는 1912년 3월 1일 당시 평양고등상업학교(평양고상)로 설립 및 개교되었으며, 진남포상업고등학교(진남포상고)는 1916년 3월 1일 진남포고등상업학교(진남포고상)는 설립 및 개교 후, 둘 모두 1945년 광복(8·15 을유해방)이 도래하고 나서 이듬해 1946년 3월 6일 당시 평양상고(평양상업고등학교)로 학교 통폐합 체제 개편 조치 처분된 이후 통폐합된 평양상고(평양상업고등학교)는 1년 후, 1947년 3월 11일 당시 평양고보(평양고등보통학교)에 통폐합 조처되었으며, 이듬해 1948년 2월 11일 당시 김일성대 법학부 경제학과 과정으로 이관 조처됨.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평남 공립 진남포상공업학교 또한, 1945년 8월 15일, 을유 해방 이듬해 1946년 3월 13일 당시 평양상고(평양상업고등학교)로 학교 통폐합 조처 이후 1년이 지난, 1947년 3월 18일 당시 김일성대 공학부 방직공학과 및 법학부 경제학과 과정 등에 강제 통폐합 조처됨.
↑평안남도 대동 지역에서 태어난 친일 관료 출신으로 일제 시대 경상북도 문경군수 등을 지낸 그는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총독부 예하 경상북도 문경군 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