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해 황씨(平海 黃氏)는 고려 때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를 역임한 황온인(黃溫仁)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2]
한때 기성 황씨(箕城 黃氏)로 불리었으나, 후에 기성(箕城)이 평해(平海)로 바뀌면서 평해 황씨(平海 黃氏)로 불린다. 우리나라 황씨의 고향인 월송정이 바로 평해에 있다.
월송정
역사
평해황씨는 고려 말~조선 초중기까지 가장 융성하였다.
고려에서 삼중대광 1명, 문하시중 2명으로 재상을 3명 배출하였다. 또한 조선에서는 3명의 공신이 있었다. 그러나 공신 책봉 횟수로 따지면 협찬창조공신, 위화도회군공신, 개국원종공신, 조선개국공신 2등, 선무훈이등공신으로 총 5번이 책봉되었다. 덕분에 조선에서 5명이 정승으로 추증되었다.
불행히도 가문의 족보는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1604년 선무훈이등공신(宣武勳二等功臣)이기도 했던, 당시 예천군수 문절공파 예빈공파 해월공 황여일(黃汝一)이 새로이 평해 황씨 족보인 평해황씨초간세보(平海黃氏草刊世譜) 간행하였다. 덕분에, 아직도 선조들의 관직, 배우자, 묘소의 위치 등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다.
평해 황씨는 조선시대 급제자는 문과 22명, 무과 급제자 19명, 사마시 47명, 역과 2명을 배출하였다.[3]
주요 선조들
3세조 황유중(黃裕中)은 고려에서 최고 관직인 종1품 문하시중(조선의 정승/도제조, 현재의 총리)을 역임하였는데, 이분의 아들인 진, 서, 용으로부터 검교공파, 문절공파, 충경공파로 갈라졌다. 현재 존재하는 많은 파들은 모두 이 3파로 기본으로 한다. 충선왕 전까지는 고려 최고 관직이 정1품이 아닌 종1품이었다. 충선왕이 삼중대광을 만들어 정1품을 신설하였다.
4세조 문절공 황서(黃瑞) 또한 고려에서 종1품 문하시중(조선의 정승/도제조, 현재의 총리)에 올라 다시 한 번 일인지상 만인천하의 자리에 올랐다. 충렬왕 때 원나라에 3번이나 다녀오며, 이 공훈으로 본관인 평해를 현에서 군으로 승격시켰다.[4] 이에 고려 후기 평해황씨를 명문가 반열에 올려 놓은 실질적인 평해 황씨의 부흥조이다. 문절공파의 시조이다. 문절공파에서는 조선에서 공신이 1명 나왔다.
4세조 충경공 황용(黃墉)은 문절공 황서(黃瑞)의 동생으로, 고려의 정1품 삼중대광보국(고려 충선왕이 새로 만든 최고위 관직, 이전까지는 문하시중이 최고위 관직)에 올라 신하로써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충경공파의 시조이다. 충경공파에서는 조선에서 공신이 2명이 나왔고, 공신 책봉 횟수는 4번이다.
7세조 충경공파 황천계(黃天繼)는 경기전라경상 삼도관찰사(京畿全羅慶尙 三道觀察使)였고, 조카인 8세조 황희석(黃希碩)과 함께 함경도 영흥에서부터 조선 태조 이성계를 보좌하기 시작하였다. 조선(朝鮮)이 개국하고 협찬창조공신(協贊剏造功臣)으로 책봉 되었다.
8세조 충경공파 양무공 황희석(黃希碩)은 고려(高麗)에서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였고, 삼촌 황천계(黃天繼)와 함께 이성계를 따르기 시작하여 위화도 회군까지 함께 하였다. 위화도회군공신(威化島回軍功臣),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태조 특지로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2등에 책봉되어 총 3번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이르렀다. 사후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되었다.
8세조 검교공파 황유정(黃有定)은 호가 미균(米均)으로 한성판윤, 예조전서, 공조전서, 형조전서를 지낸 인물로 정도전의 여동생인 봉화 정씨와 혼인하였다.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은 아들이 죽자, 사위인 황유정(黃有定)에게 영주의 삼판서고택을 물려주었다. 아들인 9세조 황현(黃鉉)은 태종과 세종 대에서 성균관 대제학과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4세조 문절공파 예빈공파 해월공 황여일(黃汝一)은 임진왜란 때, 권율을 종사관으로 보좌하여 선무훈이등공신(宣武勳二等功臣)이 되었다. 후에 1604년 예천군수 때, 소실된 평해황씨 족보를 새로이 간행하였다. 다음은 평해황씨초간세보(平海黃氏草刊世譜)의 서문이다.
대대로 벼슬하던 우리 세족이 천민과 노예로 흘러 떨어지고 자손이 길가에서 만난 사람처럼 남보다도 더 멀어진 것을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끝없이 통탄함이 여기에 이르렀다.[5][6]
주요 3분파(分派)
1세 황온인(黃溫仁) : 고려(高麗), 금오장군(金吾將軍), 태자검교(太子檢校).
➝ 2세 황우정(黃佑精) : 고려(高麗), 군기소윤(軍器少尹).
➝ 3세 황유중(黃裕中) :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3세 황유중(黃裕中)의 세 아들인 4세조로부터 큰 3파로 나누어졌다.
즉, 첫째 황진의 '검교공파', 둘째 황서의 '문절공파' , 셋째 황용의 '충경공파'이다.
검교공파(檢校公派) : 황유중의 첫째인 4세 황진(黃璡)의 후손들
검교공파(檢校公派)의 시조 : 황유중의 첫째인 4세 황진(黃璡), 고려(高麗)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 5세(지정, 서정)
➝ 15세 황중윤(黃中允) : 14세 황여일의 첫째 아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지제교(知製敎),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2] 7세 황운기(黃雲起) : 6세 황세영의 둘째 아들
분파
파시조
소윤공파(少尹公派)
7세 황운기(黃雲起) : 6세 황세영의 둘째 아들. 고려(高麗). 내자소윤(內資少尹).
문절공파(文節公派) 항렬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윤(潤)
口식(植)
찬(燦)
口달(達)
종(鍾)
口영(泳)
동(東)
口희(熙)
규(奎)
口호(鎬)
한(漢)
口락(樂)
경(炅)
口기(基)
충경공파(忠敬公派) - 황유중의 셋째인 4세 황용(黃墉)의 후손들
충경공파(忠敬公派)의 시조 : 황유중의 셋째인 4세 황용(黃墉). 고려(高麗).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 5세 황태백(黃太白) : 고려(高麗).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전서(刑曹典書). 조선 태조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추증.
➝ 6세 황우(黃祐) : 고려(高麗).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전서(兵曹典書). 조선 태조 때, 좌의정(左議政)으로 추증.
➝ 7세(천록, 천상, 천복, 천계)
[1] 7세 황천록(黃天祿) : 6세 황우의 첫째 아들
➝ 7세 황천록(黃天祿) : 고려(高麗). 자헌대부(資憲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圖判書公). 조선 태조 때, 영의정(領議政) 추증.
➝ 8세 황희석(黃希碩)
7세 황천계(黃天繼) : 경기전라경상 삼도관찰사(京畿全羅慶尙 三道觀察使), 협찬창조공신(協贊剏造功臣). 8세 황희석과 함께 영흥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를 보좌하기 시작함.
➝ 8세 황을석(黃乙碩) : 7세 황천계의 외아들. 공조전서(工曹典書).
충경공파(忠敬公派) 항렬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口구(九)
병(昞)
口범(範) 기(起)
인(仁) 口택(澤)
口의(義) 동(東)
예(禮) 口희(熹)
口지(智) 철(喆)
신(信) 口호(鎬)
승(承)
口식(植)
욱(煜,郁)
口규(奎)
종(鐘)
口제(濟)
경주 황씨(慶州 黃氏) 항렬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口석(錫)
영(奎) 해(海) 원(源)
口근(根)
희(熙) 병(炳) 영(營)
口기(基)
금(金)
口수(水)
목(木)
口화(火)
토(土)
口금(金)
수(水)
평해 황씨의 기원
평해 황씨는 물론이고, 한국의 거의 모든 황씨는 중국 한나라 사람 도시조 황락(黃洛)으로부터 계를 이어왔다.
황락(黃洛)의 선조
중국의 삼황오제인 황제 헌원씨(黃帝 軒轅氏)의 손자가 전욱 고양씨(顓頊 高陽氏)이고, 이 전욱의 현손이 요순시대에 살았던 혜련(惠连)이다. 제요 도당씨(帝堯 陶唐氏)는 혜련에게 황하의 치수를 맡겼고, 보상으로 황(黃)이라는 성과 운(云)이라는 이름 그리고 삼호(参胡, 현재의 섬서성 펀양시)땅을 받아 황나라(黃國)를 세웠다.
황나라는 춘추전국시대인 BC 648년에 초나라에게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전한시대에, 황씨들을 형주 강하군(현재는 후베이성 우한 일대)으로 이주시켜 살게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춘추전국시대 사군자 중 한 명인 초나라 춘신군 황헐(黃歇)과 한나라 말의 촉나라 황충(黃忠), 오나라 황개(黃蓋), 촉나라 제갈량의 부인 황씨(黃氏)가 있다. 대표적인 지명으로 황석(黄石), 황강(黃冈), 황학루(黄鹤楼) 등이 있다.[11]
황락(黃洛)의 일생
황락(黃洛)은 전한(前漢) 성제(成帝) 건시(建始) 3년(BC 30년) 신묘(辛卯)년에 출생하여 수화(綏和) 1년(BC 8년) 계축(癸丑)년에 입신하고,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4년(28년) 무자(戊子)년에 대장군(大將軍) 강하후(江夏侯)로 봉해졌다. 이후, 한나라 때 사신으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당시 고구려 땅인 근을어현(斤乙於縣 :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에 이르렀고 이후 이곳에 정착했다. 황락(黃洛)의 일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울진군기성면 척산3리에 위치한 문절공황서신도비명(文節公黃瑞神道碑名)에 기록되어 있다.
시조의 표류지인 월송정(越松亭) 자리는 원래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무예를 단련하던 곳으로 고려시대에 월송정이 건축되었다. 또한 도시조 황락(黃洛)을 기리는 제단인 시조단이 월송정 바로 옆 소나무 숲에 위치한다.
황락의 후손 중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 삼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갑고는 기성군(箕城君), 둘째 을고는 장수군(長水君), 셋째 병고는 창원백(昌原伯)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평해 구씨와의 관계
조선 후기 현종 때, 정시술이 저술한 『동국제성(東國諸姓)』과 1927년 일제강점기 최종해가 저술한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 따르면,
중국 후한 때, 육종(陸終)의 먼 후예(後裔) 중에 해(海), 락(洛), 호(湖) 3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둘째인 황락(黃洛)은 중국후한 유신이었다. 서기 28년(후한 광무제 건무 4년, 신라 유리이사금 5년) 구대림(丘大林) 장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 지금의 베트남)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길을 잃고 망망대해를 헤매던 중, 신라의 동북 해변인 평해읍 월송리 굴미봉(崛尾峰) 남쪽 기슭 월송봉(越松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이 지금의 월송정(越松亭)이다. 그 후 황락(黃洛)은 신라에 귀화함으로써 평해에 정착하여 황장군으로 불리며 살았으며, 한국 황씨(黃氏)의 도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평해 월송(越松) 지역에는 황장군의 묘가 있다.
황락과 같이 신라에 온 구대림(丘大林)은 평해 구씨의 시조가 되었고,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다만, 평해 구씨 기록으로 보면 구대림(丘大林) 장군은 당나라 사람으로 663년(신라 문무왕 3)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으로 되어있어 기록이 상이하고 시기가 후한이 아닌 당나라이다. 그래서 황락과 구대림이 같은 시대에 한반도로 넘어왔다는 기록은 허구로 보여진다.
원래 고구려의 땅으로 이름이 근을어현(斤乙於縣)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평해(平海)로 이름이 바뀌어 유린군(有隣郡)의 영현으로 삼아 평해현(平海縣)이라 하였다.
고려시대
고려 현종 때 소속을 바꾸어 예주(禮州)의 영현인 평해현(平海縣)이 되었고, 1172년(고려 명종 2년)부터는 지방관인 감무(監務)를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충렬왕 때는 문하시중 황서(黃瑞)의 공을 높이사, 본관인 평해현(平海縣)을 평해군(平海郡)으로 승격시켜주었고, 지군사(知郡事)를 파견하였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 1466년(세조 12년)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울진군 평해면이 되었고, 1963년에는 울진군이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9월 1일 기성면(箕城面)이 평해면에서 분리되었고, 1980년 평해면이 평해읍(平海邑)으로 승격되었다.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에 위치한 누각으로, 관동팔경 중 하나. 3대 황씨인 평해 황씨, 장수 황씨, 창원 황씨의 3대본. 고려시대에 세워짐. 우리나라 황씨의 시조인 황락(黃洛)의 표류지에 세워진 누각. 과거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이 말을 무예를 연마했고, 평해 황씨를 명문가에 올려놓은 고려 문하시중 황서(黃瑞)가 평해현을 평해군으로 승격시키며 건축되었다는 설이 유력. 일제 말기에 주둔 해군이 파괴하고 1980년에 다시 세워짐. 누각에 올라가면 한 눈에 보이는 동해바다 경치와 이를 액자처럼 감싸는 해송(바다 소나무)이 일품임.[12]
시조단(始祖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 월송정 바로 옆 소나무 숲에 위치. 조선 후기 숙종 때, 세워진 제단. 우리나라 모든 황씨의 시조인 황락(黃洛)을 기리기 위해 황락이 터를 잡은 곳에 조성.[13]
경상북도 영주시에 위치한 고택. 고려에서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이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 살다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을 낳고 기른 곳으로, 이후 사위인 미균(米均) 황유정(黃有定)에게 물려주었고, 한성판윤, 예조전서, 공조전서, 형조전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이 병을 이유로 낙향하여 말년을 보낸 고택. 다시 황유정은 사위 김소량(金小良)의 차남인 이조판서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에게 물려주어 3명의 판서가 살았다하여 삼판서고택이라 불림.[14]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61호. 황락(黃洛)을 시조로 한 평해 황씨 3대본이 이곳에서 비롯. 과거에는 해월헌(海月軒)으로 불림. 경북 울진 기성면 사동리 동해안 자락에 위치. 평해 황씨 중 문절공파(文節公派) 중 해월공파(海月公派) 시조인 황여일(黃汝一)의 신위가 모셔져 있음.[15]
중종 1년(1545년)에 추보재(追報齎)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재사(齋舍) 건물. 황정(黃玎)의 학문과 효를 기리기 위해 지어짐. 1915년에 새롭게 서원 형태로 건물을 중건. 평해 황씨(平海黃氏) 불권헌공파(不倦軒公派) 문중에서 관리. 도봉서당 바로 뒤편 산기슭 헌안왕릉 바로 옆에 황정(黃玎)의 묘가 있음.
황서 신도비(黃瑞 神道碑)
1980년 8월에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에 세워진, 고려 후기 문신 황서의 신도비.[16]
양무공사(襄武公祠) : 고려말 회군공신(回軍功臣), 조선초 2등 개국공신(開國功臣)인 황희석의 사당으로 평해군묘(平海君廟).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죽2리(원평)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
대표 인물
황온인(黃溫仁) : 1세조(一世祖). 금오위 대장군과 태자검교(太子檢校)를 역임.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당시에는 기성(箕城)으로 불렸던 평해(平海)에 세거하였다.
황서(黃瑞) : 4세조. 황유중(黃裕中)의 둘째 아들. 평해 황씨(平海 黃氏) 문절공파(文節公派)의 파시조. 충렬왕(忠烈王)때 세자를 위해 원나라에 세 번이나 다녀옴. 이후 충렬왕(忠烈王), 충혜왕(忠惠王), 충숙왕(忠肅王), 충목왕(忠穆王)의 4조(朝)에서 봉사하면서 원나라를 총 31번이나 다녀옴. 이 익대공훈(翼戴功勳)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금어대(金魚袋)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벼슬을 역임. 함께 본관인 평해현(平海縣)이 평해군(平海郡)으로 승격. 고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문절공(文節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음. 조선이 들어서면서 고려의 기록이 많이 훼손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음. 1980년 8월 후손들이 울진군 기성면 척산 3리에 문절공 황서 신도비명(文節公 黃瑞 神道碑名)을 세워 문절공 윗대의 기록과 문절공 황서의 기록을 남겨 길이 전해지게 하였다.[17]
황용(黃墉) : 4세조. 황유중(黃裕中)의 셋째 아들. 평해 황씨(平海 黃氏)의 충경공파(忠敬公派)의 파시조.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을 역임. 시호는 충경(忠敬).
황희석(黃希碩, ? ~ 1394년) : 8세조. 황천록의 아들. 고려와 조선에서 모두 공신으로 책봉. 고려말 우왕 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1383년 함경남도 단주(현재 북한의 단천시)에서 이성계의 휘하에서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로 참전하여, 침략한 호발도(胡拔都)를 격퇴. 1388년(우왕 14년) 요동정벌군에 참여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회군하여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봉. 1392년 정몽주가 암살됐을 때 그를 지지하는 파를 탄핵하는 일을 맡았다. 개국 이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제수. 1392년 10월 9일 개국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는데, 같은 해 11월 19일 태조의 특지(特旨)에 따라 개국 2등 공신으로 올려 책록되었다. 1394년 8월 3일 졸했다. 군호는 평해군(平海君). 시호는 양무(襄武). 아들은 황상(黃象), 황인(黃麟), 황난(黃鸞), 황곡(黃鵠) 4형제를 두었다. 사당은 평해군묘(平海君廟)로서 양무공사(襄武公祠)라 하며 충북 증평군 증평읍 죽2리(원평)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검교공파에서 분파하여 양무공파(襄武公派)의 파시조가 되었음.
황근(黃瑾) : 황진(黃璡)의 증손. 고려 공민왕 때 우헌납(右獻納)을 지냈다. 공민왕 11년(1362년)에 지진(地震)의 변고에 대하여 극론(極論)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옥천 수령(沃川守令)으로 좌천되었다가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고, 후에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겸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냄.
황유정(黃有定,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 1421년),7세조 : 황근(黃瑾)과 문정공(文貞公)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딸인 순흥 안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 호는 미균(米均). 12세인 1355년(고려 공민왕 4년) 안동도회(安東都會)에 시를 지었고 이를 본 시관이 과거응시를 권유하였고 과게에 급제. 하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오직 글 읽기만 즐김. 특히 논어를 손에서 놓지 않음. 고려 말에 판윤(判尹), 예조전서(禮曹典書), 공조전서(工曹典書),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역임하고, 또한 조선 초에도 한성판윤(漢城判尹), 예조전서(禮曹典書), 공조전서(工曹典書),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역임하였다. 정도전의 여동생인 봉화 정씨 부인과 결혼한 정도전의 매제이다. 정도전 사후에 연좌되지 않고 벼슬을 계속하였다. 말년에 병이 생겨 경상북도 영주의 삼판서고택에서 지냄. 묘역은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을좌지원(乙坐之原)으로 황분토(黃墳土, 덕동).[18]
황현(黃鉉, 1372년 ~ ?) : 황유정의 둘째 아들. 조선 태종, 세종.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인수부윤(仁壽府尹), 행성균대사성(行成均大司成). 1393년(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으로서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에 초배(超拜)되었다. 태종과 세종 대에 대사성을 지냈으며, 1428년(세종 10)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1429년 행성균대사성(行成均大司成)을 겸직하였다. 1430년 변계량(卞季良)과 함께 행성균대사성으로서 문과초시 때 강경(講經) 중 두가지 시제(試題)만을 뽑아 제술(製述)할 것을 건의, 실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여전히 초록집(抄錄集)에만 의존하고 경학(經學)을 경시한다는 건의에 따라 그 뒤 다시 과거에서 경서강독(經書講讀)이 시행되었다.
황연(黃鋋) : 황유정(有定)의 셋째 아들. 선성현령(宣城縣令). 풍기로 이주하여 살았으므로 안동, 풍기, 영주, 예천, 봉화 일대에 평해 황씨가 번성하였다.
황정(黃玎, 1426년 ~ 1497년) : 자는 성옥(聲玉), 호는 불권헌. 성종 5년(1474년) 49세에 사마시에 합격. 이후 여러 벼슬을 함. 청렴하였고, 경학(經學)에도 밝았다. 경주 도봉서당은 원래 황정의 재사(齋舍) 건물이었다.
황서(黃瑞, ? ~ ?) : 자는 정옥(廷玉). 황자중(自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전(詮)이고, 아버지는 황세통(世通)이며, 어머니는 윤질(尹晊)의 딸. 1552년(명종 7) 사과(司果)로서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같은 해 봉상시주부가 되어 전경(殿經)에 참여. 1555년(명종 10)에 사헌부지평. 그 후 예조정랑을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지만, 도망노비에 대한 처벌을 엄격하게 하지 않아 파직. 1556년 사간원헌납으로 복직. 이 후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부응교를 역임. 1559년에 경상도에 어사로 파견. 이후 홍문관응교, 의정부검상 겸 사인, 홍문관전한을 거쳐 1564년 직제학. 이후 승정원동부승지 겸 예조참의, 우부승지 겸 좌부승지, 병조참지를 거쳐 1566년(명종 21)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다.
황준량(黃俊良, 1517년 ~ 1563년) :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조선중기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이황(李滉)의 문인.[19]
황여일(黃汝一, 1556년 ~ 1622) : 해월공파의 파시조.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황세충(世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연(璉)이며, 아버지는 유학(幼學) 응징(應澄)이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 검열이 되었는데, 하번사관(下番史官)임에도 불구하고 출입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는데, 얼마 뒤 도원수의 허락을 받고 일시 귀가하여 도원수와 함께 추고(推考)당하였다. 1598년 사서에 이어 장령이 되고, 이듬해 장악원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천군수가 되고 1606년 전적을 역임, 1611년(광해군 3) 길주목사, 1617년 동래진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조천록(朝天錄)』, 『해월집』 14권 7책이 있다.
황만영(黃萬英, 1875년 6월 20일 ~ 1939년 4월 24일) : 독립운동가. 해월 황여일의 11대손. 1905년 성힉현 의진에 군자금 8백냥 지원. 1907년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대흥학교(大興學校) 설립. 1912년 만주 신흥학교(新興學校) 재정 담당. 1925년 임시정부 참가. 1927년 신간회(新幹會) 울산지회(蔚山支會) 회장에 선임.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20]
황영시(黃永時, 1926년 ~ ) : 제24대 육군참모총장, 제11·12대 감사원장 역임.
↑장, 희응. “황서”. 《디지털울진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5년 4월 4일에 확인함. 충렬왕(忠烈王) 때 세자를 위하여 세 번이나 원나라에 갔다 와서 익대공훈(翼戴功勳)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을 역임하였다. 평해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왕에게 상소하여 평해현이 평해군으로 승격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