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에티엔 플랑댕
피에르에티엔 플랑댕(프랑스어: Pierre-Étienne Flandin, 프랑스어: [pjɛʁ etjɛn flɑ̃dɛ̃], 1889년 4월 12일~1958년 6월 13일)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보수주의 정치인이다. 민주공화동맹(ARD) 대표와 프랑스 총리 (1934년~1935년)를 지냈다.[1][2] 생애1889년 4월 12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용 비행사였던 플랑댕은 전간기 시절 여러 장관직을 거쳤다.[3] 내각 경력은 1924년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마르살 내각에서 상업부장관으로 임명된 것이었으나 임기는 5일에 불과하였고, 1931년과 1932년 앙드레 타르디외 내각에서 상공부 장관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중간에는 피에르 라발 내각에서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34년 2월 6일~11월 8일에는 제2차 가스통 두메르그 내각에서 공공사업부 장관을 지냈다. 1934년 11월 45세의 나이로 프랑스 총리가 되었으며 이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의 총리였다.[3] 그러나 불과 7개월 뒤인 1935년 6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총리 재임 동안 프랑스는 여러 중대한 외교조약을 체결하였는데 프랑스-이탈리아 협정, 스트레사 전선,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 등이 대표적이다.[1] 1936년 3월 7일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라인란트의 재점령을 위해 국방군을 동원하는 사태가 벌어질 당시 플랑댕은 프랑스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었다.[4] 플랑댕은 강경 대응에 나서고자 하였으나 영국의 협조 없이 단독 행동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5] 이어지는 뮌헨 위기에서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지지한 것은 플랑댕의 경력에 타격을 입힌 판단으로 평가된다.[3]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인 1940년 12월 13일, 비시 프랑스의 국가원수 필리프 페탱이 피에르 라발의 후임으로 외무부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하였다.[6] 그러나 취임 두 달 만인 1941년 1월 프랑수아 다를랑으로 교체되었다.[7] 1944년 프랑스 해방이 이뤄진 뒤, 플랑댕은 반역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대신 국가에 불충했다는 사유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이 역시 전시 중 레지스탕스를 도운 공로로 감형되었다.[8] 1958년 6월 13일 생장카프페라에서 사망했다. 프랑스 부르고뉴 아발롱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었으나, 2017년 5월 테러로 희생된 영국 국회의원 조 콕스를 기리는 거리명으로 바뀌었다.[9][10] 플랑댕 내각다음은 플랑댕 내각 (1934년 11월 8일~1935년 6월 1일)의 장관 목록이다.
출처
외부 링크
|
Portal di Ensiklopedia Du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