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남서로회남서로(淮南西路)는 송나라가 설치한 로 중 하나로 지금의 화이허 이남 ~ 장강 이북 안후이성 지역을 통치했다. 정강의 변 이전에는 1부 7주 2군을, 이후에는 2부 6주 4군을 통치했다.[1] 행정 구역여주(廬州)망급주로 보신군절도(保信軍節度)가 파견되었다. 1108년(대관 2년), 급이 망급으로 격상되었다. 과거 회남서로 병마검할의 치소가 있었는데, 1128년(건염 2년) 본로안무사를 겸하게 되었다. 소흥초에 치소를 소현으로 옮겼다. 1166년(건도 2년)부터 1169년(건도 5년)까지 화주의 민정을 담당했다. 숭녕연간에는 83,056호, 178,359명이 살았다. 견직물, 밀랍, 석두를 공납으로 바쳤다. 3현을 두었다.
기주(蘄州)망급주로 군명은 기춘군이고 방어가 파견되었다. 건염초 금나라에 점령되었다가 1135년(소흥 5년) 수복되었다. 1260년(경정 원년), 치소를 용기(龍磯)에 두었다. 숭녕 연간에는 114,097호, 193,116명이 살았다. 모시, 대나무로 짠 돗자리를 공납으로 바쳤다. 5현을 두었다.
안경부(安慶府)군명은 동안군(同安郡)이고 덕경군절도(德慶軍節度)가 파견되었다. 960년(건륭 원년), 본래 단련이 파견된 본주를 방어로 고쳤고 1115년에 덕경군이라는 군명이 하사되었다. 건염 연간에 서, 기진무사(舒, 蘄鎮撫使)가 설치되었다. 1133년, 서주, 황주, 기주의 3개 주를 강남서로안무사절제(江南西路安撫司節制)에게 맡겼다. 1147년 안경군(安慶軍)으로 군명이 바뀌었다. 1195년(경원 원년), 영종의 이름을 피하면서 안경부로 승격되었다. 1236년(단평 3년), 나찰주(羅刹洲)로 치소를 옮겼다가 또 양착주(楊槎洲)로 옮겨졌다. 1260년, 선성을 개축했다. 과거 연강제에 속했던 곳에 사사(使司)를 두었다. 숭녕 연간에는 128,350호, 341,866명이 살았다. 백술(白術)을 공납으로 바쳤다. 5현을 두었다.
호주(濠州)상급주로 군명은 종리군이다. 단련이 배치되었다. 건도 초에 수오당(戍藕塘)으로 옮겼다가 1211년(가정 4년) 정원현(定遠縣)을 설치했다. 숭녕 연간에는 64,570호, 153,457명이 살았다. 견직물과 조어(糟魚)를 공납으로 바쳤다. 2현을 두었다.
광주(光州)상급주로 군명은 익양군이다. 광산군절도(光山軍節度)가 파견되었다. 과거 군사주였으나 선화 원년 군명이 하사되었다. 1158년, 태자 광영(光瑛)의 이름을 피하여 장주(蔣州)로 개명되었다. 1237년(가희 원년) 내란으로 인해 치소가 금강태(金剛台)로 옮겨졌다가 이후 복구되었다. 숭녕 연간에는 12,268호, 156,460명이 살았다. 석두, 갈포를 공납으로 바쳤다. 4현을 두었다.
황주(黃州)하급주로 군명은 제안군(齊安郡)이다. 군사가 파견되었다. 건염 시기 연강제치부사사(沿江制置副使司)가 통치했다. 숭녕 연간에는 86,953호, 135,916명이 살았다. 모시, 연교(連翹)를 공납으로 바쳤다. 3현을 두었다.
무위군(無爲君)하급주와 급이 같다. 태평흥국 3년, 여주 소현 무위진에 군을 세우고 소현과 여강현으로 소속시켰다. 건염 2년, 금나라가 들어왔다가 수복되었다. 경정 3년, 소현을 진소군(鎭巢軍)으로 승격시켰다. 숭녕 연간에는 60,138호, 112,199명이 살았다. 견직물을 공납으로 바쳤다. 3현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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