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노 고레미치
후지와라노 코레미치(일본어: 藤原 伊通 ふじわら の これみち[*])는 헤이안 시대 후기의 공경이다. 후지와라 북가 나카미카도류 곤다이나곤 후지와라노 무네미치의 차남이다. 관위는 정2위 태정대신이다. 쿠죠의 저택에서 살았기 때문에, 쿠죠 다이쇼고쿠(九条大相国) 또는 오오미야 다이쇼고쿠(大宮大相国)라 불렸다. 약력덴에이 3년 (1122년)에 참의로 승진했다. 그러나 다이지 5년 (1130년) 10월, 자신보다 나중에 참의가 된 후지와라노 나가자네가 먼저 곤츄나곤으로 승진한 것을 못마땅히 여겨 칩거를 했다. 덴쇼 원년 (1131년)에 관직 (참의, 중궁 곤다이부, 우병위독)을 그만두었다. 조쇼 2년 (1133년), 조정에 복귀해 곤츄나곤으로 승진했다. 이후, 관백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에게 접근하여, 규안 6년 (1150년)에 딸 테이시/시메코를 타다미치의 양녀로, 고노에 천황에게 입내시켰다. 이어, 고노에 천황의 어머니 후지와라노 토쿠시/나리코 (비후쿠몬인)와 타다미치 등의 신뢰를 얻어, 발언력을 강화해 니조 천황의 에이랴쿠 원년 (1160년)에는 사촌인 후지와라노 무네스케의 뒤를 이어, 정2위 태정대신에 승진했고, 이후 사망할 때까지 5년에 걸쳐 재임했다. 조정의 본연의 자세를 설파한 『대괴비초(大槐秘抄)』를 저술하여, 니조 천황에게 바친 것으로도 알려졌으며, 이를 받은 천황도 관백 타다미치와 함께 코레미치를 중용하여, 친정 성향을 강화하여 고시라카와인과 대립하였다. 코레미치에게 있어, 비후쿠몬인은 외사촌남매이며 (코레미치의 어머니는 나가자네의 자매), 또, 타다미치는 여동생의 남편으로, 그의 출세 배경에는 이러한 규벌의 힘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신의 풍부한 재주에 의한 정치력도 있고, 또한, 시가・관현・서예에도 능통한 문화인으로, 재치 있는 입담으로 늘 궁중 사람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던 일 등이 전해진다. 여러 의미에서 동시대의 제1급 궁중인이었다. 또, 선례를 존중하면서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에 구애받지 않는 유연성도 갖고 있었다. 또, 격한 성격인데다가 독설가이기도 했다. 헤이지 원년 (1159년), 헤이지의 난 후에 후지와라노 노부요리가 멋대로 행한 논공행상에서 무사를 후대하는 것을 보고, "사람을 많이 죽인 자가 은상을 받는다면, 어째서 산죠도노의 우물에 벼슬을 줄 수 없는가"고 공언, 난의 주모자인 노부요리 측의 군세가 산죠도노를 불태웠을 때, 많은 여관이 우물에 뛰어들어 사망한 것을 인용하여 노부요리를 통렬히 비판했다 (『이마카가미(今鏡)』, 『헤이지모노가타리(平治物語)』). 또한, 『대괴비초(大槐秘抄)』에서는 옛의례의 부흥을 설파하는 한편, 귀족이나 사찰에 주어져야 할 봉호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대신하는 것으로 장원이나 지행국의 제도가 존재하고 있음을 설파하며, 장원 정리령을 비판하고 있다. 일기로 『쿠죠 다이쇼고쿠기(九条相国記)』 (『곤다이나곤 코레타다교기(権大納言伊通卿記)』)가 있다. 후시미노미야어기록소수 『백단어불어자필법화경공양부류기(白檀御仏御自筆法華経供養部類記)』, 『본조세기(本朝世紀)』, 『어유초(御遊抄)』 등에 다이지 5년 (1125년), 호엔 원년 (1135년), 2년, 규안 2년 (1145년), 3년, 4년, 5년의 기문이 있다. 『쿠죠 다이쇼고쿠 지모쿠초(九条相国除目抄)』라는 제목에 관한 총 8권의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조서적목록(本朝書籍目録)』). 이 책은 현존하지 않지만, 『어로우보(魚魯愚鈔)』, 『제목초(除目抄)』 등에 보이는 「구초(九抄)」, 「여초(要抄)」로 표기된 것이 그것일 것으로 보인다. 일화
계보
각주 |
Portal di Ensiklopedia Du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