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동해안에 있어 고대 숙신·읍루·예맥·옥저·말갈·부여 등 여러 종족이 활동하는 영역이었으며,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는 이들을 완전히 통합하면서 편입하였다. 고구려가 668년(보장왕 27)에 멸망한 이후에는 당나라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발해가 건국되면서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의 영토초기에는 황해도 북계에서 동해의 원산만에 이르는 선의 이남 지역이었다. 발해가 거란에 의하여 멸망한 뒤에는 거란의 영토가 되었다. 발해가 멸망할 때 이탈한 일부 말갈족 집단인 여진(女眞)이 강성해져서 거란을 멸망시키고 금나라의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다시 몽고족에 의하여 원(元)나라가 건국되자 역시 원나라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 한편 금나라가 멸망한 뒤 여진족은 두만강 유역으로부터 점차 함경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고려의 국경 부근에서 자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고려 말엽 원나라가 쇠퇴하고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고려의 북진정책이 실효를 거두어 여진을 몰아내니 그 세력 범위는 두만강 하구에 이르렀다. 과거 여진의 소파온성(所坡溫城)이 있던 이 고장은 동북면(東北面)의 길주(吉州)에 속하여 있었다.
조선시대 1398년(태조 7) 정도전으로 하여금 북도의 행정구역을 분정하게 할 때 이곳은 길주목 성진첨사(城津僉使) 관하의 성진진(城津鎭)이었다. 1614년(광해군 6) 소파온고성 자리에 석성을 쌓고 첨사(僉使)를 두었다가 1701년(숙종 27)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였다. 1749년(영조 25)에 첨사로 하여금 방수장(防守將)을 겸직하게 하였다가 1895년에 폐지되었다.
1898년에는 길주군 성진첨사 관하의 성진진과 동해면 일부 및 함경남도 단천군 이하면 좌측을 합한 지역을 분할하여 함경북도 성진군으로 독립되었다. 다음해 마산·군산과 더불어 개항장(開港場)이 됨에 따라 외국인 거류 구역이 설정되면서 일개 어촌이 차츰 항구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배후지의 지하자원과 임산 개발에 의한 광석과 목재의 집산항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고주파 제강 공장 및 마그네사이트·내화연와 공장(耐火煉瓦工場) 등이 잇따라 건설됨에 따라 공업 도시로서도 크게 번창하여 1943년에는 함경북도성진시(城津市)로 승격되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차지했으며, 1951년 2월 성진시(城津市)가 함경북도 김책시(金策市)로 개칭되었다.
↑“Station 47025 Kimchaek”. 《Global station data 1961–1990—Sunshine Duration》. Deutscher Wetterdienst. 2017년 10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1월 6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