랴오양(遼陽)은 양평(襄平)으로 불렸고, 이 지방 일대를 중국이 지배하던 중 중심지가 되었다. 전국시대에 연나라의 요동부의 중심이 되었다. 진나라(秦)는 요동부의 군치(郡治)를 이곳에 두었고, 전한과 후한의 시대에는 영토가 동으로 확대하여 현토군(玄菟郡)에 속하였다.
고구려가 양평(襄平)을 차지한 후 요동성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설치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후에 소재지를 평양에서 이곳 양평으로 옮겼다.
요나라 시대에 요양으로 개명하여 요의 부도(副都,陪都)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가 되었다. 금나라도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를 부도(副都)로 하였다. 이 시기 동경에 있었던 황족 烏禄은 제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에 반항하는 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해릉왕을 멸하고 제5대 황제 금 세종으로 즉위하여 요양에 백탑(白塔)등을 건설하였다.
원나라는 요양 행중서성(遼陽行中書省)을 두었고, 명나라는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후금은 1622년 요양으로 천도하였다가 요양의 교외에 동경성을 쌓았다. 3년후 봉천(奉天)으로 천도할 때 동경성의 목제와 석재가 봉천으로 운반되어 동경성은 폐허가 되었다. 요양은 그 후 요양주로 개칭하고 봉천을 본거지로한 성경장군(盛京将軍, 후의 봉천성 (奉天省))의 아래에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