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가비우스 막시무스마르쿠스 가비우스 막시무스 (Marcus Gavius Maximus, 156년 사망)는 고대 로마의 기사로, 하드리아누스 및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기에 민간과 군사 등 중요한 공직을 거쳤다. 북이탈리아의 피르뭄이 그의 고향으로 여겨지며, 그의 투표 부족인 팔라티나(Palatina)가 그곳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의 계통은 아버지 쪽의 프라이노멘인 마르쿠스를 기록하고 있다.[1] 그와 변호사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가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인 사이였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으 프론토는 가이우스 켄소리우스 니게르의 주요 상속자이자 유언 집행인으로 지정되었는데,[2] 이 니게르의 유언장에는 가비우스 막시무스와 황제 모두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담겨 있었다. 생애가비우스 막시무스가 대부분의 기사 계급들이 자신의 경력을 시작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인 '트레스 밀리타이'를 거쳤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에게서 확인된 첫 직책은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의 '프로쿠라토르' 또는 총독이다.[3] 앤서니 벌리는 하드리아누스가 128년에 해당 직책을 맡겼고, 막시무스는 132년까지 수행했을 것이라 여긴다.[4] 총독으로 있던 시절, 그는 '학설휘찬'에 남아있는 증인들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교서를 하드리아누스로부터 받은 몇 안되는 총독 중 한 명이었다.[5] 막시무스는 다음으로 아시아 속주의 프로쿠라토르로 등장하는데, 이곳에서 그는 134/135년 원로원 속주의 '프로콘술'이던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6]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이후에 그를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마메르티누스를 동료로 한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로 임명하였다. 이는 기사 계급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 중 하나이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막시무스는 20년간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였다.[7] 139년과 143년 사이에 그가 프라이펙투스였음을 입증하는 독자적인 증거가 있었다.[8] 그가 죽고 나서 자리를 물려받은 가이우스 타티우스 막시무스는 그 직위를 맡은 시점은 적어도 156년 이후로 확인된다.[9] 이 점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주장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고, 막시무스가 그 누구보다도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에 오랜 기간 재직했음을 나타난다. ![]()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막시무스를 냉혹한 자라고 묘사하기도 하지만, 그는 항구 도시 오스티아 안티카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으며, 오스티아에 호화스러운 공중 욕장을 선물해주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어려운 일"이라고 기 드 라 베두아예르 (Guy de la Bédoyère)는 말하였다. "가비우스 막시무스가 왜 이 욕장의 비용을 지불하려고 했는지, 그가 그런 투자를 할만큼 충분히 부유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민간의 후원은 로마 세계에서 사실 아주 흔한 것이었긴 하지만 가비우스 막시무스가 이 항구 도시와 특별한 연관성이 없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10]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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