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라틴어: praefectus praetorio, 그리스어: ἔπαρχος/ὕπαρχος τῶν πραιτωρίων)은 로마 제국의 고위 관직 중 하나이다. 로마 황제의 친위대 지휘관에서 비롯한, 이 관직은 관직을 역임했던 인물들이 황제의 핵심 조력자가 됨에 따라 점차 방대한 법적 그리고 행정적 권한들을 얻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권한이 상당히 줄어들어 순전히 민간 행정 관료직으로 바뀌었으며, 콘스탄티누스의 후임자들 치세 기간에는 로마 제국의 최고 행정 단위인 대관구의 최고 지방관이 되었다. 프라이펙투스는 많은 법령들을 이들의 이름으로 반포함에 따라, 다시 한번 정부의 핵심 관료로서 기능하였다. 이러한 기능을 통해, 이 직위는 동로마 제국 (그리고 동고트 왕국)에서 계속해서 임명되었다가, 서기 7세기 이라클리오스 치세 때 방대한 범위의 개혁이 이뤄져 이들의 권한을 줄이고 단순히 속주 행정에 대한 감독자 신분으로 전환시켰다. 이후에도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의 마지막 흔적은 동로마 제국에 남아 있었지만 840년대 무렵에 사라졌다.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라는 용어는 비문에서 자주 "PR PR" 혹은 "PPO"로 축약된다.[1][2] 역사친위대 사령관제정 시기에 친위대 혹은 왕실 근위대 들은 한 명에서 두 명, 혹은 세 명의 지휘관 (praefecti praetorio)의 지휘를 받았으며, 이 지휘관들은 황제가 기사 계층에서 선택한 이들이고 그의 마음에 따라 관직을 유지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때부터 이 관직은 원로원 의원들에게도 개방되었고, 기사 계급 출신이 여기에 임명되었을 경우 동시에 원로원 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하였다.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의 군사적 성격을 없애버린 콘스탄티누스 때 이후로는 일반적으로 퇴역한 군인들, 그 중에서도 사병에서부터 승진했던 이들이 주로 맡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이 지닌 지휘권은 프라이펙투스 우르비가 지휘하는 병(cohortes urbanae)을 제외한 이탈리아 내 모든 병력들을 포함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3] 친위대라는 특수한 위치는 그들에게 로마 정부 내에 힘을 가져다 주었고, 친위대의 지휘관인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는 곧 로마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황제들은 친위대들을 비위 맞춰주고 통제하려 했으나, 친위대들은 수많은 쿠데타를 일으켰고 빠른 황제 교체 빠른 황제 교체 비율에 기여하였다. 따라서 친위대는 친위대라는 조직의 의도와 달리 로마 정부를 뒤흔들어놨다.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는 제정 후기에 들어서서 해당 관직이 로마 제국의 핵심 관료 임무들과 더불어 친위대에 대한 직접적인 지휘권이 합쳐지며, 주요한 행정 관직이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행정 및 군사 구조에 대한 방대한 개혁의 일부로써 이들의 권한들을 상당히 줄였다. 행정관으로 전환![]() 군사적 기능과 더불어,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는 형사사건에 대한 재판권을 얻었는데, 그는 단순히 대리가 아닌 황제의 대표자라는 신분으로써 이 업무를 수행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 쯤에는 황제의 부섭정 및 ‘대신’ 같은 대고관의 일종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에 실제적 군 지휘권을 없앴다. 프라이펙투스는 로마군의 병참을 책임지는 핵심 병참 지휘관 역할을 유지하였다. 또한 제국의 대규모 예산을 편성하는 핵심 재정 관료이기도 했으며, 제국의 부유층들에게 부과된 국가에서 실시하는 종교 의무 행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행정 당국의 대표라는 지위가 사라졌고 궁정 소속 고위 관료들과 이 지위를 공유해야만 했다. 331년에 콘스탄티누스는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의 선고 결과를 가지고 항소 절차를 밟을 수 없음을 승인하였다. 민사 부문에서 유사한 사법권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기 이전에 프라이펙투스가 얻었다. 이에 따라 법적 지식이 치세 때 이 관직의 요구조건이 되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콤모두스 치세 그리고 특히나 세베루스 치세 때부터는 당대 최고의 법학자들 (파피니아누스, 울피아누스, 파울루스 등)이 이 직위를 역임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요안네스 카파도키스 때부터는, 군사적 요건은 점점 더 뒷전으로 떨어졌다.[3]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 정치 체재 개혁 (296년경)은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의 수를 늘렸는데, 정제 한 명 당 친위대의 사령관으로서보다는 최고 관료 (군사 및 행정) 지위로서 한 명씩 있게 되었다. 프라이펙투스들 각자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만들어낸 네 구역 중 한 곳을 관장하였으며, 이 구역들은 서기 330년경 콘스탄티누스의 어린 아들들에게 배정된 대관구가 되었다. 395년부터는 로마 (이후에는 라벤나)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등 왕궁이 두 개만이 남게 되었으나, 대관구 네 곳은 비키리우스들이 담당한 관구 (로마 속주들의 집합체)들을, 통솔하는 최고 행정 단위로 남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 치세 때, 마기스테르 밀리툼 직위 개설이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의 군사적 성격을 가져갔으나 제국의 고위 민간 관료직이라는 지위는 유지되었다.[3] 게르만족 시기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는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이탈리아 침입에 무너진 뒤에도 유지되었던 여러 직위 중 하나였으며,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명목상 가신이었던 동고트 왕 테오도리크 대왕의 궁전의 경우가 그랬는데, 테오도리크는 로마 시대의 행정 방침을 그대로 유지했었다.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로 알려진 인물 목록다음은 기원전 2세기 아우구스투스가 직위를 설립했을 때부터 314년에 친위대가 폐지될 때까지 프라이펙투스 프라이토리오로 알려진 인물들의 목록이다.[5] 이 목록은 직위를 수행한 정확한 인물들의 수, 인물들의 이름, 재임 시기 등을 기록한 사료들의 부족 때문에 불안전하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친위대는 가끔씩 세야누스나 부르루스 경우처럼 한 명의 프라이펙투스의 지휘를 받기도 했으나, 보다 자주 로마 황제들은 공동의 지휘권을 가진 프라이펙투스 두 명씩을 임명했었다. 목록의 겹치는 시기는 공동 지휘를 나타낸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기원전 2년 – 서기 68년)
네 명의 황제의 해 (서기 68 – 69년)
플라비우스 왕조 (서기 69 – 96년)
오현제부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서기 96 – 193년)세베루스 왕조 (서기 193 – 235년)
3세기의 위기 (서기 235 – 285년)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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